영화 일기#042 트럼보

공산주의, 그리고 공상주의

특이한 방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몇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청년 ‘헤로스트라토스’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어떻게든 이름은 남았으니 성공적이라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 남자, 조셉 매카시는 어떤가. “지금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의 명단이 있습니다.” 냉전의 한가운데서 공산주의를 외치다! 열렬히 공산당을 싫어한 그도 이름을 남겼다. ‘매카시즘’이라는 하나의 이념, 시대를 이끈 트랜드 세터로서 활약도 아주 오래 했다.

영화와 사상, 그리고 매카시즘

정치적인 영화란 무엇일까. 정치인을 다룬 영화? 어떤 이념, 사고체계를 학습하게 하는 영화?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본다고, 이념이 형성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차원에서 영화는 어떤 ‘관점’을 어필할 수 있는 매개체다. 그리고 초창기엔 그렇게 이용되었다. 영화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기의 역사와 함께 발전했고, 덕분에 프로파간다 영화, 즉 정치 선전용으로 많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중 가장 악명 높은 영화는 레니 뤼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인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히틀러의 이미지는 압도적이고, 그래서 위험했었다.


정치 선전을 위해 제작된 영화, 뉴스릴 외에도 영화가 이념을 내포할 방법은 있다. 극영화의 서사 구조, 그리고 주인공의 설정에 따라서도 관객은 다양한 관점을 내면화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트럼보> 속에 전쟁영화에 열광하는 대중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당시 전쟁영화는 미국 영웅의 승리라는 서사를 내포하고 있었고, 미국의 승리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이어진다. 당시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애국이라는 행위였고, 이 영화를 보며 열광하는 것은 ‘애국자’ 되기의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때 영화는 미국, 자유주의의 우월성과 위대함을 어필하는 관점을 취하고, 관객은 이를 무의식중에 학습하게 된다.



그리고 매카시즘의 시대가 있었다. 매카시즘의 역할은 ‘구분 짓기’였는데, 특정 정책에 반대하는 이는 공산주의자로 분류하고, 사회에서 격리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구분 짓기가 난감한 이유 중 하나는, 공산주의에 가담한 적 없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야했다는 것에 있었다. 없는 기록과 사실을 어떻게, 어떤 증거로 증명해야 할까. 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안보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기에, 대중이 논리가 아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비난한다는 것도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매카시즘이 영화에 끼친 영향은 ‘검열’에 다.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념이 깔릴 수 있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시나리오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이들은 영화계에서 퇴출을 당해야 했다. <트럼보>에 등장하는 ‘헐리우드10’은 그 좋은 예가 되겠다.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도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고 하니, 매카시즘의 광풍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상상이 되는가.



이름 잃은 작가

“‘네, 아니요’ 로 대답하는 것은 바보 아니면 노예”라는 대사는 헐리우드 10이 매카시즘의 시대에 어떻게 맞서고 있는가를 알게 한다. 그들이 어떤 이념을 가졌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물론, 달튼 트럼보는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졌었지만,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 공산주의 국가에 협력하고, 미국에 위협을 가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유신체제 하에선 그러한 이념과 사상을 말하는 게 범죄였지만, 미국은 이념과 사상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던, 비교적 성숙한 나라였다. ‘트럼보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추구했으니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멸공을 외치던 과거 한국적 상황에 맞춰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보가 맞서 싸웠던 것은 표현의 억압이라는 올가미였다. 매카시즘이라는 이념 아래, 반매카시즘적인 표현과 주장을 하는 것은 반역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프레임 아래 한 번 여과되고 ‘국가가 허락한 말’로 대체되면서 표현의 자유는 사라진다. 이런 상황 앞에서 트럼보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하려 했다. 배운 사람으로서, 작가로서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부가 어떻게 영화 제작이라는 표현의 매체에 관여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매카시즘이 말한 반역자가 된다 해도, 작가로서의 자신은 잃지 않으려 했던 트럼보는 끝내 신념을 지켜낸다. 하지만 그가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곳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위험한 인간으로 분류되었고, 그가 쓴 대본은 불순한 대본이었기에 제작이 금지된다. 그 이후로도 그는 글을 계속 썼지만, 이름을 숨겨야 했다. (무려 11개의 가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글을 계속 썼지만, 예전처럼 ‘멋지고 훌륭한 것을 쓰던 시절’은 갔다. 소양이 없는 글, 깊이 생각하면 안 되는 글을 써야 했다. “생각을 해야지 난 작가니까”라 말하던 그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국가 안에서 작가로 설 자리가 없다. 그 덕에 그 시대는 예술을 잃은 시대가 되었다.



트럼보가 잃은 것

트럼보에겐 가정이라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쓰레기 같은 삼류 글이라도 써야만 했다. 생각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신념이 있음에도, 생각 없는 글을 써야 했던 것은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다. 생계 앞에서 그는 아름다운 글을 버리고, 휴지를 보급하듯 신속하게 공산품 같은 글을 썼다. 그때부터 트럼보는 창을 닫고,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글을 쓴다. 이는 트럼보가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가족과의 단절을 나타낸다. 그는 세상에서 격리된 집 안에, 또 하나의 바리케이드를 쌓고, 가족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트럼보가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텐데, 글을 쓸수록 가정은 붕괴한다. 아이들을 아꼈던 아버지는 딸의 생일도 무시하면서 글을 써야 할 정도로 변했다. 트럼보는 약을 먹으면서까지 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족과의 불화는 극에 달했다. 이 남자의 글쓰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생계를 위해 미친 남편, 신념을 위해 미친 작가. 확실한 것은 ‘미쳤다’는 행위이고, 이것이 매카시즘의 반작용으로 생긴 또 하나의 광기라는 것도 명확해 보인다.


다행히도 트럼보는 자신이 가정을 붕괴시켰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회복하는 기회도 얻는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자신이 매카시즘 앞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모두 상처받았다고. 그가 쓰고 싶었던 글이든, 그가 지키고 싶었던 가정이든 모두 파괴되었다. 그가 존재하던 이유가 무너졌기에 그 자신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게 <트럼보>가 보여주고 싶었던 사실이고, 그 시대를 재현한 목적이다. 이 영화는 상처받은 역사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 시대가 잃은 것

<트럼보>는 오스카상을 되찾은 위대한 작가의 이야기로 끝나지만, 해피 엔딩으로 끝난 이야기는 아니다.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작가를 프레임에 담고, 이젠 저물어 버린 매카시즘을 뒤로한 채 영화는 마무리되지만, <트럼보>는 그 시대를 견뎌냄으로써 희생자가 되어버린 남자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두 번의 오스카상 수상은 트럼보의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시대가 버린 많은 ‘승리’에 대한 애절함을 대변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름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고, 정당히 승리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는가.

‘영화’도 잃은 게 많다. 좋은 작가가 있음에도 그 능력이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던 시대. 영화상엔 두 편의 걸작으로 그 시대에 위안을 던지고 있지만, 매카시즘은 너무 많은 기회를 불태웠다. 트럼보가 썼던 <로마의 휴일>, <브레이브 원> 등의 걸작보다 그가 쓰지 못한 걸작들을 못 봤다는 게 더 뼈아프다. 11개의 가명이 대체 할 수 없던 단 하나의 이름, 트럼보라는 온전한 이름으로 쓴 극본을 영화화했다면 우리에겐 좀 더 많은 걸작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이들, 할리우드를 떠나야 했던 이들이 만들었을 영화는 또 어떤 작품이었을까. 매카시즘은 참 많은 필름을 불태워 버렸다.


“영웅과 악당은 없고, 희생자만 있었다.”는 그의 대사가 그 시대를 대변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을 분류한 것은 매카시즘이라는 허상이었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 아래, 사람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받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줬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 앞에 누가 웃을 수 있었는지 <트럼보>는 묻는다. 정체 없는 존재들 앞에서 이름을 잃었던 시대. 그 암울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엔 있다.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

먼 나라의 과거 시제의 일이지만, 한 나라의 현재 시제일 수 있다는 것에 이 영화는 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트럼보>가 던질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자산 중 가장 부러워할 만한 것. 표현의 자유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광기의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미국이 건져낸 것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각성이었다.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 미국 수정 헌법 제1조.


수많은 상처 속에 지켜온 이 문장은 미국 최고의, 역사의 산물이다. 이 문장 속에 있는 시민의 권리는 한 국가가 부패하고, 망가질 수 있어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되어줄 것이다. 올해 개봉했던 <스포트라이트>는 ‘종교’라는 신성불가침의 존재 앞에서도 탐사보도의 정신을 잃지 않는 언론인들이 등장했었다. 그들에게 지침이 되었던 것도 이 문장이었다. <트럼보>와 <스포트라이트>엔 광기, 공포, 편견, 그리고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 인물이 있다. 그들은 옳은 것, 말해져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명시된 권리를 잃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인간의 가치와 자리를 지켰다.



<트럼보>엔 몇 가지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몇 있다. ‘영화 동맹’이라는 어떤 단체가 특정 사상을 비난하고 편을 나눠 대립하는 행위, 군 복무를 회피했으면서 군에 대해 이야기하고 애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물, 탈세는 되지만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은 범죄라고 말하는 인물, 끝으로 블랙리스트로 개인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인물까지….


우리는 이 영화를 과거 시제로만 이해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걸까. 이 시대, 이 세상에겐 매카시즘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광풍, 혹은 담론이 없는가. 트럼보가 이름을 찾은 것을 보고, 진정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이름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되물어 보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화 일기#041 오베라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