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돌이켜보면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에도 푹 빠져있었고 한 때는 삼국지, 창세기전, 대항해시대나 이브온라인과 같은 게임을 하느라 밤을 지새운 날도 많았다. 만화책이나 무협지, 판타지 소설과 같은 것들도 무진장 읽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보다 먼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다.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도의 마을 앞에는 공군 부대가 하나 있었다.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을 내며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매일 보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소음 피해를 보며 살았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동네 어르신들은 대부분 귀가 좋지 않으시고, 다들 목소리가 우렁차다. 전투기 소음을 뚫고 서로 대화를 나누시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매일 하늘로 날아오르던 그 전투기의 이름이 '제공호'라는 건 동네 어른들이 알려주셨다. 소음 피해를 보고 사셨지만 동네 어른들이 그 '제공호'라는 이름을 말하실 때 뭔가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였을까? 그렇게 시끄러웠지만 나도 그 비행기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KF-5 제공호(Photo by 대한민국 공군 누리집)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참고서를 고르기 위해 잠시 들렀던 동네 서점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월간 항공'이라는 잡지였는데 그 자리에서 한참을 손에 쥐고 본 기억이 난다. 그날 참고서가 아니라 그 잡지를 들고 나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이후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 달 서점에서 그 잡지를 샀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독한 잡지가 바로 '월간 항공'이었다. 그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것들로 나의 관심사가 바뀌었지만 간간히 신문이나 방송에서 항공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여전히 더 눈여겨보고 있다.
며칠 전(22년 7월 19일) 우리나라에서 만든 전투기인 KF-21이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밀리터리 덕후분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초음속 전투기가 구상이나 설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고, 날아올랐으니 말이다.
초도비행에 성공한 KF-21 시제기(Photo by 국방홍보원)
우리나라도 항공기에 관해서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비거(비차)라는 사람이 탈 수 있는 비행기구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시기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자체 동력이 아니라 바람을 이용한 비행 기구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항공기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나라의 공군은 1948년에 창설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소수의 연락기나 정찰기뿐이어서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없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국에서 프로펠러 전투기인 P-51 머스탱 10대를 공여받아 본격 운용을 시작했다. 그 이후 제트 전투기인 F-86, F-4, F-5와 같은 미국의 전투기들을 도입해서 운용했다. 냉전시대에 미국의 자유 진영에 대한 지원 혜택을 본 측면이 있었지만, 공군의 역량이 획기적으로 강화된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베트남전에 참전 즈음인 68년부터 도입한 F-4는 우리나라 공군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우리나라는 F-4를 세계에서 4번째로 운용하게 되었는데 당시 F-4는 세계 최강급 전투기였으므로 우리나라 공군력이 순식간에 강회 된 것은 분명하다. 현재는 F-15, F-16과 최근 도입된 스텔스 전투기인 F-35를 주력 전투기로 운영하고 있다.
편대비행 중인 F-4와 F-5(Photo by 대한민국 공군 누리집)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만들어낸 전투기는 위에서 언급한 KF-5 제공호다.(미국 전투기 명칭에 K가 붙으면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는 뜻이라고 보면 된다). 제공호는 82년부터 5년간 면허생산으로 68대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생산도 큰 의미가 있다. 그 이후 베스트셀러인 F-16도 우리나라에서 KF-16이라는 이름으로 120대가 면허 생산되었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전투기를 면허 생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체 모델 개발을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왔다. 그 첫 번째 성과가 KT-1이다. KT-1은 프로펠러 기본 훈련기다. 1991년 초도 비행에 성공한 이래로 2000년대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고 현재 공군에서 기본훈련기, 전술 통제기 등으로 운용하고 있다. 그 이후 제트 엔진을 장착한 고등훈련기인 T-50이 만들어졌고, 이를 경공격기로 개조한 FA-50도 개발되어 현재 실전 배치되어 있다.
FA-50 경공격기(Photo by 대한민국 공군 누리집)
T-50은 초음속 항공기를 자체 개발한 경험이 없던 상태에서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에 미국의 방산업체인 록히드 마틴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일부 계약상 제약조건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항공산업 발전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보인다. T-50 계열(FA-50 포함) 항공기는 현재 200대가 넘게 운용 중에 있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라크, 태국 등에서 운용 중이다. 60대 이상이 해외로 수출되었고, 앞으로 수출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
KF-21은 T-50 계열 항공기와는 수준이 다른 또 다른 성과로 볼 수 있다. 고등훈련기로 개발되어 경전투기 정도의 역할이 가능한 T-50/FA-50과 달리 처음부터 본격 전투기로 계획되고 만들어진 4.5세대 전투기다. 5세대인 F-22, F-35와 같은 스텔스 전투기의 성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주력으로 쓰고 있는 라팔, 유로파이터, F-18 등의 전투기들과 같은 등급의 전투기로 기대된다. 향후 5세대인 스텔스 전투기로의 개량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와 공동 개발국인 인도네시아 이외의 국가가 얼마나 도입할지 여부는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검증된 기존 전투기들과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고 적당한 가격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KF-21(Photo by KAI)
KF-21 개발을 비판하는 여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외국의 항공기를 직도입해도 충분한데 자체 개발로 오히려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또 미국 등 군사 강국은 6세대 전투기 개발을 시작하고 있는데 4.5세대급 전투기 개발은 무의미하다는 비판이다. 단순 비교로 국내 자체 개발 예산이 직도입 대비 더 크다고 해도 국내에서 생산된다는 것은 산업적인 파생효과와 그 이익이 국내 기업에게 돌아간다는 측면에서 이익이 작다고 할 수 없다. 또한 4.5세대급 전투기 개발 기술이 없다면 6세대 개발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자체 항공 기술을 축적한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에 누리호 2차 발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KF-21의 초도비행 성공까지 우리나라의 항공우주 기술 수준이 진보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과거 매월 서점을 들러 사 모았던 '월간 항공'에는 주로 해외의 항공기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요즘도 그 잡지가 계속 발간이 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제 잡지 기사 중에 우리나라에서 개발하는 항공기들에 대한 기사가 얼마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