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들에서 말했던 일들을 겪은 후 대기업에서 직원이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하는 일이란 어떤 개인이 영향력을 펼치기엔 힘든 일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근무하며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내린 답은 '시스템'이었다. 대기업은 굉장히 크고 많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진행하는 사업 또한 굉장히 규모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퇴사를 했을 때, 혹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로 인해 사업에 많은 변화가 있다면 큰 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체계화된 시스템을 만들어두고 직원들이 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게 한다. 어떤 사람이 나가든 다른 사람이 들어오든 해당 시스템에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사업은 예정대로 잘 진행될 것이다. 이 때문에 대기업에서 하는 업무란 반복적이고 전문성을 가지기 힘든 면이 많았다. 그 안에서 가진 전문성이란 그 회사 내부에서만 통하는 전문성이었다. 외부의 다른 모든 기업이 그런 체계화된 시스템을 가지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앞선 글들에서 말했던 이유들, 그리고 위에 적은 생각으로 인해서 나는 대기업에서 하는 업무들로는 개발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냈다. 이후 내가 고민했던 것은 이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 일하게 된다면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였다.
우선 내가 하던 일을 나열해봤다. 앞선 글에서 이미 적었지만 크게 3가지였다. 외부 개발팀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과제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의사 결정하기, 만들어진 과제에 대해서 간단한 것은 내가 디버깅하기 그리고 개발 외의, 혹은 개발과 관련된 잡다한 업무 처리하기. 나는 이 일이 전문성을 지닌 것인가, 남들은 하지 못하는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개발자로서의 어느 정도의 지식은 필요했다. 다른 부서들과 협업을 하고 외부 개발팀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하는 일이 회사 외부에서도 필요로 하는 일인가 하는 것에는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하는 일들로 배우는 지식 혹은 얻는 스킬을 외부의 다른 회사에서 필요로 해줄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다.
사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주위의 더 오래된 연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유능했다. 일을 잘했고 아랫사람들을 잘 다뤘다. 그 정도의 위치에 갔다는 것은 회사에서 확실하게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실제 개발에선 오랫동안 손을 떼었기 때문에 공학적인 지식은 남아있을지언정 개발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만약 내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사람들이 필요하다면, 그런 이들을 고용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나는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관리'라는 것은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대로 된 '관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겪어본 적은 없어서 사실 잘은 모르겠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훌륭한 전문성을 지닌 관리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전문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봤던 분들의 관리는 과연 전문성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들게 만들었다. 나라면 기술력이 좋은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개발자를 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평생직장의 개념은 거의 사라진 지 오래이다. 미래의 나는 반드시 언젠가는 회사에서 나와야만 할 것이다. 내가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으로 성장하든(내가 잘해나간다면 앞서 말한 그분들과 같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성장하지 못하든 언젠가는 회사를 떠나야 할 테고 그때 나는 어떻게 남은 삶을 꾸려 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한, 회사에서 하는 일엔 전문성이 없었고 회사의 밖으로 나섰을 때 내가 했던 일로 먹고 살 자신이 없었다. 이후의 나는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돈을 받는 대신 개발자로서의 전문성을 잃어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