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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an 15. 2021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물건 02. 명함

오랜만에 책상 정리를 하다가 이전 직장에서 만들었던 명함이 나왔다. 하단에 찍힌 내선번호를 보며 '이제 이 번호를 누르면 누가 받으려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모두 쓰레기통에 차르르 쏟아 넣었다. 회사명, 부서명, 내선번호와 이메일 주소, 직함. 서랍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명함과 같이 발견된 향초나 메모지는 조금만 먼지를 털어내면 지금도 쓸 수 있지만, 명함에 담긴 숱한 정보들은 그렇게 툭툭 털어내고 다시 쓸 수가 없다. 까맣게 박힌 글자들 중 지금도 유효한 것은 내 이름 하나뿐이기 때문에.


TV 드라마 속 남자 조연 배우가 읊을 정도로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 버린 김춘수의 시 '꽃'에서의 한 구절처럼, 이름이라는 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가 그곳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하자 빛이 생겨나고 어둠이 있으라 하니 어둠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수년 만에 만났어도 이름을 부르며 인사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하게 되는 까닭은 그가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름은 단순히 글자 몇 개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중성적인 이름이 흔해진 요즘에야 드물지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내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꼭 최소 한 번씩은 되묻곤 했다. 네? 이름이 뭐라고요?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도 드물었거니와 그다음 이어지는 반응들도 거의 백이면 백 비슷했다. 남자 이름 같네, 누가 지어줬어? 중학생 때 집 근처 독서실 사용 등록을 하고 돌아온 이튿날, 다시 찾아간 독서실 남자방에 내 이름이 배정되어 있었던 일은 사춘기 소녀에겐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한 번에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도 드물었고, 힘들게 알아듣고도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다시 만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마치 '난 결코 네 이름을 한 번에 맞춰 주진 않을 거야!' 다짐이라도 한 듯) 내 이름과 굉장히 유사하지만 절대 동일하지는 않은 이름들로 나를 부르곤 했고, 때문에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 소개를 할 때면 이름을 한 글자씩 꼭꼭 씹어내듯 알려주는 버릇이 있다(최근에는 카페였던가, 이름을 한 글자씩 힘주어 발음하는 나를 보며 상대가 풋 웃음을 터뜨린 적도).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싫어했고, 늘 드라마나 소설책에 나오는 여성스럽고 발음이 쉬운 이름들을 선망했다.


이름에 대한 내 악감정이 사라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그날따라 거나하게 약주를 한 잔 하고 들어오신 아버지가 좀 앉아보라고 하시더니 들려주셨던 이야기. 네가 태어나던 날 사실은 할아버지가 미리 정해놓은 이름이 있었는데 내가 듣기엔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 이름을 너에게 주었다간 평생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고 (그 이름을 가진 분들께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여기에는 적지 않기로 한다). 그렇지만 첫 손녀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몇 날 며칠 고심해 이름을 지어오신 할아버지의 정성을 외면하기도 그래서, 고민 끝에 아버지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를 대며 지금의 내 이름을 주기로 하신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고등학생 시절 학교 문집에 글을 실을 때 썼던 당신의 필명이었다.


고고학자가 꿈이었던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결국 전공을 달리해 국립대로 진학하셨는데, 그전까지는 글을 제법 잘 써 고교 재학 시절 내내 문집에 고정으로 글을 기고하셨다고 한다. 몇 년간 분신처럼 썼던 이름을 이제 막 태어난 내 딸에게 주고 싶다고 하니, 할아버지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실 수 없었다고.... "아니 아빠 그 얘길 왜 이제야 해! 진작 얘기해줬으면 내가 내 이름 싫어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머쓱하게 한 마디하며 방으로 들어왔지만 그 날 이후 내심 '나는 아버지의 필명을 이름으로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제법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내 이름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요새 싹쓰리나 환불원정대처럼 부캐가 유행이라는데 어쩌면 난 아버지의 부캐를 이름으로 가진 것이 아닐까. 우연찮게 서랍장에서 발견한 명함 덕분에 끄집어낸 오래 전 기억 덕분에 마음이 1도 정도 따뜻해진 오후, 서두에서 언급했던 김춘수 시인의 "꽃"으로 마무리해본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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