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코로나 19와 함께한 영화, 드라마 1

by 초로록
(사진 출처: <비밀의 숲> 공식홈페이지)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방영 당시 한창 호평받던 드라마를 이제야 봤다.


검찰 비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차고 넘쳤고, 그런 영화가 권력층의 비리를 다루는 방식은 항상 뻔했다. 기득권이 돈과 여자, 권력에 취해 있는 모습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다가 정의로운 주인공이 조금이라도 뭔가를 바꿔보지만 결국 아무리 용을 써도 부정부패는 우리 사회에서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 아류의 영화 혹은 드라마들이 지겨웠다. 2시간 내리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다가 마지막엔 힘을 빠지게 만들었으니까. 이 드라마라고 다를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별로 볼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비밀의 숲> 역시 검찰 비리를 다루는 드라마인데, 최순실 게이트나 문고리 3인방 등의 용어에 익숙해진 2020년에도 여전히 이 드라마는 말할 거리가 있었다. 검찰 비리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인물과 사건을 그려내는 방식 때문이었다.



우선 조승우가 연기한 황시목 검사를 이야기해야 한다.

황시목 검사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엔 좀 의아했다. 황시목 검사는 감정과 공감 능력을 관장하는 뇌선엽을 제거하는 수술을 학창 시절에 받은 후, 그 이후엔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데 <겨울연가>류의 한국 로맨스 드라마로 빠지기 딱 좋은 설정이라 불안한 요소였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 설정이 회를 거듭할수록 조승우의 연기력을 빛나게 만들었다. <비밀의 숲>을 보는 동안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뒤통수를 몇 번 맞았는데 거기엔 황시목 검사의 역할이 컸다.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없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모든 일을 대하니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지금 황시목이 뭔가를 눈치챈 건지, 아님 꼼수를 부리고 있는지 당최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연기한 것도 아닌데 미묘한 흐름이 얼굴에 쓱 지나갈 정도로만 보여주다니. 역시 믿고 따라가는 조승우다.


(사진 출처: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30/2017073000165.html )


황시목 검사의 캐릭터 설정 외에도 이 드라마에서는 완전히 청렴하지도, 끝까지 부패하지도 않은 애매한 인물들이 많다는 데 이 드라마의 매력이 있었다. 심지어 드라마 속에서 주축이 되어 검찰의 비리를 캐내고 있는 황시목 조차도 자리 욕심을 내비치며 부장검사 자리를 두고 이창준에게 딜을 하는 순간이 있었다. 영원히 우리 편일 것 같았던 강원철 3 부장 검사도 부장검사들 중에서 가장 강직하고 올곧은 인물이었지만 수사가 정점을 향해 가자, 검사장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황시목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이 이윤범인지 이창준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윤범일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었다기보다는 '설마 이창준이겠어?' 라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중반에 영일재 전 장관이 '나는 창준이를 10년 동안 봤다, 걔는 그럴 애가 아니다' 라는 말에 어렴풋이 나도 설득당했던 것 같다. 그래, 한창 젊었을 때 강직하고 촉망받는 검사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본성은 남아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범인이 이창준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내가 느낀 허탈함이 아마도 <비밀의 숲>의 작가가 시청자에게서 기대하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정의롭고 올곧은 인물도 '작은' 타협을 서서히 허락해가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게 된다는 것, 타협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는 것, 변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새롭게 살기 위해서는 상당한 희생과 자기 파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이창준을 통해 보여주었다.

(물론 이윤범 같은 인물은 끝까지 뉘우침 없이 살기도 한다. )



(사진출처 : <비밀의 숲> 공식 홈페이지)

이창준은 자기 내면의 모순과 문제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미 손에 들어오기 시작한 권력과 명예를 저버리지 못했고, 이에 끌려가며 살다가 범죄를 저지른 후 막바지에 와서야 자기를 바로 보기 시작한 인물이다. 왜 피로 다시 일궈야 한다고 유서에 썼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배두나가 연기한 한여진 경위는 등장인물 중 가장 분명하고 심플한 사람이다. 나쁜 놈은 잡아야 하고 부정부패는 침묵하니까 계속 생기는 거라고, 눈 부릅뜨고 짖으면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이 흔들림 없이 쭉 간다. 그렇다고 이 정의로운 인물에 황시목처럼 어떤 서사를 부여하거나 갈등을 하게 하지 않은 작가의 설정도 담백해서 좋았다. 어쩌면 정의롭고 바르게 사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다. 원칙을 지키면 되는 일이니까.






인물 외에도 <비밀의 숲>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도 이야기하고 싶다.

수사물에서는 범인을 드러내는 방식이 작품의 신선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CSI류의 미드에서는 사건과 관련된 주변 인물 A, B, C를 보여주고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A로 분위기를 몰아주다가, A가 용의자로 몰릴 것이라는 이 상황마저도 설계를 하고 범죄를 꾸민 B나 C를 최종 범인으로 검거한다. 또는 <동백꽃 필 무렵> 같이 전혀 범인으로 비중이 있어 보이지 않는 인물을 극의 초반에 드문드문 보여주다가 그가 범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사건을 후반부에 드러내는 방식도 봐 왔다.


<비밀의 숲>이 수사물로써 가지는 매력은 작품이 '범인이 그래서 누군데?'에 대한 해답을 위한 내용이 아니라

시청자가 범인을 가늠해보는 과정을 어렵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건을 꼬아놓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물들이 전반적으로 분석하기 어렵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으며 이타적인 동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헤쳐나간다. 그 중 영은수만큼 자기 욕망을 거칠고 투명하게 보여준 인물도 없다. 저러다 사고 한 번 치겠네, 싶을 정도로 매 회 불안해 보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이윤범과 이창준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동기가 명확했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범인이 되기에 영검사는 서툴고 여린 사람이었다.


거의 모두가 용의자 선상의 테두리에 걸쳐져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극의 후반부를 향해 갈 때에도 범인이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한여진도 믿을 수 없는 인물이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 <비밀의 숲> 공식 홈페이지)

정말 드라마 제목 <비밀의 숲>처럼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비밀로 가득한 어두운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한 발자국씩 발을 내딛는데, 어둠 속에서 나를 덮칠 것 같은 그 뭔가를 상상하면서 느껴지는 공포감이 극의 초반부터 끝까지 이어졌다. 대체 그래서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 추리를 해 나가는데 누구 하나 절대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두렵고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다.


겨우 하나의 사건만 일어났을 뿐인데 그게 꽤 굵직하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앞뒤 정황을 상상해보게 하다가 이어지는 두어 개의 사건으로 조금씩 그 실체에 다가가는데, 지루함이나 느슨함이 없었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 많지도 않은데 저마다의 동기가 확실해 보이도록 이야기가 짜여져 있었다. 마지막 화에서 30분을 남겨두고도 아리송한 드라마였다.




(사진 출처: <비밀의 숲> 공식홈페이지)


<비밀의 숲>의 인물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최소한 이창준 같은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이창준이라는 사람이 변하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닐까 두렵다.



그도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내레이션에서 등장한 것처럼 시작은 밥 한 끼였다.


그것도 호화롭고 비싼 밥이 아니라 그냥 국밥집에서 같이 인사 나누고 소개받으면서 편하게 먹는 그런 자리였다. 더치페이하는 것처럼 이번엔 제가 살게요, 가 다음의 식사 자리를 약속하게 되고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식사자리에서 관계가 진전되면서 보통의 인간관계와 다를 것 없는 '사소한 배려' 가 그 시작이 되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개구리는 따뜻한 물에서 서서히 데워지는 법이다.


나의 일상과 일터에서 혹시라도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허락하고 있는 정의롭지 못함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 정도는 큰 일이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덮어두지는 않는지, 정신 똑바르게 차리고 살라고 말해주는 드라마다. 이 <비밀의 숲>은 끝까지 묵직한 메시지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