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하던 마음이 그를 향해 활짝 열린 순간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을까?
그런 게 있을 리 없겠지만 내겐 '존경심'이 그것과 가깝다. 내가 진심을 다하는 관계 가령 친구, 애인의 경우, 취향도 성격도 능력도 각자 천차만별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어떤 면에서든 내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지녔다는 점이다. 때로는 전문가로서의 장인정신이기도 하고 보통사람은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가치관이나 생활방식, 태도이기도 하다. 존경심 없이 내 모든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사력을 다해 관계를 이어가게 노력하는 일은 내게 불가능하다.
모든 사랑에 양가감정이 존재하겠지만 특히 알레에게 유독 그러했다. 알레를 경멸하면서도 마음 깊이 존경했다. 알레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그 경멸은 불편함을 동반한 인간적 연민으로 변한다. 나는 알레와 함께하는 이 묘한 관계를 '카르마'라는 명명 아래 수용하게 된다.
그는 사랑에 서툰 남자처럼 보였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 없는 게 분명했다. 나쁜 의도가 없음에도 무신경한 행동은 상대를 상처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배려가 참 부족했다.
알레를 따라 시내에서 꽤 거리가 있는 그의 친구 집에 방문했다. 그 친구와 짧게 인사를 나눴을 뿐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리를 신경쓰지 않고 하던 일로 마저 돌아갔다. 알레는 그를 자기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쿠바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날은 젊은 쿠바 청년들이 온통 거리에 쏟아져 나와 커다란 앰프를 통해 울리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알레는 위험하다며 가까이 가지 말라고 날 저지했다.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고 집 근처에서 그들을 구경하며 음악을 들었다. 길거리 파티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마무리된다. 알레는 내 손을 붙잡고 더러운 매트가 달랑 놓인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첫날 키스를 제외하고 별다른 스킨십을 한 적 없었다. 그는 매트에 날 밀치더니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작지만 단호하게 '하지마! 싫어.'라고 했으나 술에 취한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 슬퍼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를 거부하지도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목석처럼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잠시 침묵과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일어났고 나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가방도 옆방에 그대로 둔 채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끝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겠구나. 조금 문제가 있다면 그곳은 시내와 꽤 떨어져 있었고 길을 몰랐고 택시가 없었다. 더구나 가방을 통째로 두고온 탓에 돈도 없었다. 그래서 맨발로 뛰쳐나온 그에게 잡혔다.
정확히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내게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그가 내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지만 그게 내게 정신적인 상흔을 남긴 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내 반응에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차분하게 설명했다. 왜 사람이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조금 슬프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그를 만났던 건 그날의 그가 아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처를 주고 어찌할 바 모르는 아이 같았다. 역시나 그 눈빛이 한몫 거든 것도 사실이다. 죄가 없어지는 마법의 눈빛.
그때부터 그는 조금씩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내게 했다.
그는 예상대로 사랑을 받아본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한다. 쿠바 법규는 꽤 엄격해서 그 일로 10년 넘게 아버지는 감옥에 갇힌다. 알레가 다 크고나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친척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진정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주 양육자는 없었다. 그는 개구쟁이였고 위험한 일을 했으며 모두 그를 떠안기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날 많이 사랑해줬어. 이유는 모르겠어."
"분명해. 너 많이 상처 줬을걸."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그랬을 것 같다."
"나를 만나면 넌 좀 더 좋은 남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런 예감이 들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루가 정말 빨리 흘렀다. 어느 날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에 같이 있자."
그게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쿠바에서는 외국인/내국인 숙소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숙소에 묵는 모든 여행객은 이름과 여권번호를 숙박 명부에 기재해야 한다. 숙소 주인은 한 달에 한 번씩 정부에게 명부를 제출해야 했다. 여행객의 시선에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쿠바 정부는 엄격하게 쿠바인이 외국인과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면 함께 있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알레를 받아주는 숙소는 없었다.
밤이 늦었다. 그는 결심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우리 집에 가자. 대신 조용히 해줘. 아버지가 깨시면 곤란하거든."
그날 밤 어둡게 비친 그의 집은 내게 충격을 줬다. 그동안 묵었던 어떤 가난한 이의 집보다 더 열악했다. 그냥 나무로 지어진 헛간 같았다. 가구는커녕 이불도 없었다. 방문도 제대로 없었다. 공사장에서 자는 기분이었다. 그의 몸 하나도 눕기 힘든 나무판자 위에 간신히 둘이 누웠다. 그는 피곤했는지 그냥 잤다. 포옹도 팔베개도 내 손을 잡는 손길도 없었다. 대체 왜 우린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의 잠을 방해하는 불청객이었다. 잠이 올 리 만무했다. 허리도 아팠다. 나는 그날 이런 결심을 했다.
'사기꾼이든 뭐든 괜찮다. 그냥 나랑 있는 동안은 편하게 먹고 자. 나를 이용한다 해도 아무 불만 품지 않을게.'
다음 날, 원래 묵던 숙소를 나와 그가 소개해준 숙소에서 그와 함께 4일간 머물렀다. 따뜻한 온수가 나오고 부드러운 매트가 있고 깔끔하고 깨끗한 화장실에 발코니까지 있는 그 숙소를 그와 함께 쓰게 돼서 기뻤다. 이미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돈' 생각은 사라졌다. 물론 밤마다 여전히 돈 계산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난 둘째 날 '나 돈 없단 말이야!' 소리 지르고 울어버리던 여자일 뿐이다. 돈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관광객.
며칠 후 평온한 아침, 숙소에서 기분 좋게 바람을 쐬고 있는 내게 그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건다.
"Stella. 화내지 말고 들어줘. 부탁이 있어. 10 CUC만 줄 수 없을까?"
"응? 왜? 어디에 쓸 건데?"
평소와 다른 그의 정중한 요청이 조금 이상하다. 역시 또 어디 쓰잘머리 없는데 쓰겠지 싶기도 해서 미간에 주름을 펴느라 혼났다. 이어지는 그의 대답은 그의 집을 본 날만큼 충격적이었다.
쿠바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단다. 특히나 관광객이 많고 일자리가 많은 수도 '아바나'는 원래 '아바나' 태생이 아니면 아바나에 살 수 없다고 한다.
"진짜 웃긴 건 말이야. 돈만 있으면 다 돼.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돈만 있으면 다 돼."
아바나 거주지 허용 카드를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물론 한시적이다. 얼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가를 생각하면 꽤 비싼 가격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그 거주지 카드가 있었지만 어느덧 기한은 만료되었다. 그는 아바나에서 수많은 여행객을 만났을 거고 자주 검문에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돌아갈 생각은 없다. 두 번 정도 경찰의 검문에 걸려 경고를 받았다가 세 번째 검문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로 추방당했다. 그 때 벌금 카드를 받았고 그 만료일이 그날이었다. 만약 기한내로 벌금을 내지 않으면 1 CUC 당 1일씩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 다 나쁜 사람을 의미하지 않아. 여기선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걸핏하면 감옥에 보내곤 하거든."
당연히 줄 수 있지! 세상에 벌금을 안 낸다고 사람을 감옥에 보내다니. 사기도 중범죄도 아닌데? 그 이유도 너무 기가 막힌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니.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
"알레!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돈 있지 않았어? 모로성 갈 때 12 CUC 택시비로 냈잖아."
"응 그랬지."
"너 바보 아니야? 어쩌려고 그래! 벌금을 그런 데다가 쓰면 어떡해!"
경악한 나의 다그침이 이어지고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구하게 될 테니깐. 그때 내가 택시비를 안 내면 네가 가버릴 것 같았거든. 그냥 그 순간 가장 좋은 선택을 했어."
내가 알레였다면 어땠을까? (물론 가장 먼저 벌금을 냈겠지만)
그 돈을 택시비로 홀랑 다 써버리고 곧 돈이 없어 감옥에 간다고 가정해봤다. 어쩌면 그렇게 잠도 잘 자고 아무 걱정거리도 없는 사람처럼 웃고 떠들고 춤추며 행복하고 온전하게 하루를 보냈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내일의 걱정은 접어두고 오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할 수 있을까? 아니 난 그럴 수 없다. 초조하고 울면서 신경질을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자기 앞에 놓인 일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함을,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주어진 조건과 상관없이 온전히 자기 걸로 만들어 충실하게 하루를 사는 그를 존경하게 된다. 그렇게 '알레'라는 사람과의 관계를 향해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