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홈스테이 천태 만상, 그리고 윔블던 어학원
예전 글: #1 미국으로 갈까 영국으로 갈까
수능을 끝낸 직후부터 영어와 담을 쌓은 지 어언 10년이 되던 나. 그런 내가 영어 공부를 하기로 결정한 어학원은 Wimbledon English School이었다. 런던에서 윔블던과 킹스턴은 부촌으로 유명했고, 무엇보다도 영국 한인 마트가 있는 뉴몰든과 많이 가까웠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아끼려고 런던 우범지역의 저렴한 어학원을 간다는데 글쎄?... 처음 가는 영국이니만큼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치안이 좋고 안전한 곳의 어학원을 다니고 싶었다.
거기서 사이프러스 출신의 터키 아줌마 아이세 (Ayshe)를 호스트맘으로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학원은 사설 학원이라 따로 기숙사가 없어서, 보통 어학원 인근에서 홈스테이를 많이 추천하곤 한다. 어학원이 따로 주변에서 홈스테이로 학생을 받고 싶은 주민들을 찾아서, 학생과 연계를 시켜주는 시스템이다. 공교롭게도 그 호스트맘이 우리가 상상하는 전형적인 백인 영국인일 확률은 매우 낮다. 보통은 세금을 내기 위해, 생계비를 벌기 위해 홈스테이를 지원한 이민자 출신 영국인일 확률이 매우 매우 높다.
나는 "한국학생을 많이 받아봤고", "아시아 학생들에게 친절한" 호스트 맘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래서 추천받은 사람이 아이세였다. 그렇게 아이세와 처음 1개월 동안 지내다가 따로 방을 구해서 나왔다가, 다시 몇 개월 후에 아이세에게로 돌아가 2-3개월 정도 있다 나왔다. 보통 아침밥만 주는 집도 있고 저녁밥도 주는 집이 있는데, 나는 아이세의 모든 밥을 다 먹으면서 지냈다. 아이세가 하는 터키 집밥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홈스테이 호스트란?
아직도 전화로 종종 안부를 물을 정도로 아이세와 나는 정말 친하게 지냈다! 보통 호스트 맘에 대해서 물어보면 별의별 후기들을 볼 수 있다. '워낙 호스트맘이 바쁘게 지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요리가 맛이 없다', '영어공부를 같이 하려고 홈스테이를 신청했는데 전혀 공부가 되질 않는다' 등등... 반면 '너무나 좋은 사람을 만나 지금도 메일을 주고받는다', '인생의 은인이다' 등등, 참 많은 스토리가 뒤섞여있다. 사실, 어학원을 다닐 때에도 내 주변의 의견들은 후자보다는 전자가 압도적이었다. 뭐가 진실일까.
난 이렇게 생각한다. 홈스테이 호스트로 나온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렇잖은가? 영국은 이렇게 홈스테이로 돈을 벌고자 하는 호스트들의 신원확인을 정말 엄격하게 한다. 범죄이력은 당연히 없어야 하고, 세금을 그동안 꼬박꼬박 잘 냈는지, 집의 시설은 적합한지, 화재보험은 들었는지 등등... 이런 신원 확인과 함께 아예 호스트의 여권을 경찰서에 맡겨놓는다고 아이세가 말했다. 아마 내 짐작에 불미스러운 일로 호스트가 해외로 도망갈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닐까.
여하튼 대체적으로 이런 '괜찮은'사람이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 건... 아마 서로의 기대치가 너무 달라서가 아닐까. 호스트들에게도 최고의 학생과 최악의 학생이 있다. 하지만 대개 좋지 않은 경험을 갖고 운영한 지 오래라, 이미 기대감을 내려놓고 이젠 비즈니스적으로 학생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학생에게 인간적인 마음을 줘 받자 상처받을 일밖에 더 있겠는가? 너무 잘해줬는데 알고 보니 알고 지내던 다른 호스트에게 내 뒷담을 했다더라, 잘해줬는데 홈스테이 후기에 별점 1개밖에 안주더라... 이런저런 일로, 호스트들은 학생들을 자기 가족처럼 반겨주진 않는다.
물론 진짜 최악의 호스트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어학원에 알려서 자신이 원하는 호스트로 교체를 해야 한다! 큰돈을 들여서 어렵게 한국에서 이곳으로 날아왔는데, 참고 지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지만 아직도 호스트는 내게 차가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이 호스트와 좀 더 친해지고 싶다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가 잊힐 한 명의 학생으로 남고 싶지 않다면?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방법뿐이다.
추억은 방울방울
내 호스트 맘은 남편분이 일찍 돌아가셔서, 매주 일요일마다 묘지에 가서 남편분에게 인사를 올리곤 했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난 가끔 일요일에 아이세에게 장미 꽃다발을 남편분에게 드리라고 선물로 사들고 오곤 했다.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거나 좀 기분을 내고 싶을 땐 마트에서 와인을 사서 같이 마시곤 했다 (프랑스나 스페인에서 들어온 값싼 와인이 마트에 잔뜩 있다!).
내 생일에는 뉴몰든의 한국 바베큐 집에 가서 친구들과 같이 음식을 먹곤 했다. 어머니의 날에는 단둘이 뉴몰든의 한국식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랑 탕수육을 시켜 먹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좀 용돈을 아껴서, 호스트맘과 같이 외식도 하며 이야기를 하면 그전에 없던 여러 추억이 같이 생긴다. 호스트맘 생일에 소소한 선물을 사주면 정말 감동받을 것이다! 비싸고 안 비싸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신경 써 주었다는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소한 추억이 쌓여 서로 간의 우정이 된다. 그 우정이 확장되면, 호스트 맘이 자기 가족들도 소개해 주고 친한 이웃과 친구들도 내게 소개해준다. 그렇게 해서 아이세 근처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차도 마시고, 점심 식사에 초대받은 적도 여럿 있다. 내 평판이 좋아지면, 호스트 맘으로 시작된 인간관계가 점차 주변으로 넓혀져 또 다른 관계들이 맺어지는 것이다.
생각보다 한국 학생들은 이렇게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을 힘들어한다. 사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마음만 열면, 한국처럼 위계질서적이지 않은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도 나보다 50살이나 많은 아이세 할머니와 이렇게 친구 먹었으니까. 영어를 잘해야 친해진다고? 전혀 아니다.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고, 이걸 알면 설령 언어가 안 되는 오지 산골에 떨어져도 세상 모든 사람들과 친구 먹을 수 있다.
영어 어학원의 일상
그럼 영어학교는 어떻게 돌아갈까? 대부분 학교에는 여러 클래스가 있다. 초짜를 위한 Beginner 클래스, 중급반 Intermediate 클래스, 그리고 상급 Advanced 클래스... 대학 입학시험을 친 한국 학생들은 최소 upper-intermediate에서 시작해서 Advanced로 끝내고 수료장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나도 이렇게 시작해서 중간에 Business 클래스도 듣다가, 막바지에는 Ielts 집중 단기반에 들어가서 아이엘츠 예문을 미친 듯이 공부해야 했다.
일반 대학이랑은 다르게, 윔블던 어학원은 건물이 매우 작아서 혼자 복습 예습을 할 공간이 거의 없다! 비어 있더라도 바로바로 다음 수업이 있어서 빨리 교실을 나가야 하니까. 그래서 보통 근처 카페에 커피를 시켜놓고 혼자 문제를 풀거나 근처 지역 도서관에 들어가서 공부하곤 했다. 수업은 보통 아침 9시-10시에 시작해서 2시 정도에 끝나는데, Ielts 나 Cambridge 어학 시험 같은 경우는 더 늦게까지 할 수도 있다. 이런 특정한 어학시험 준비반은 상시 개설되는 게 아니라서, 미리미리 언제 클래스가 열리는지 문의해야 한다! 주로 20명 내외의 소수 단위로 운영되기 때문에 마감되기 전에 빨리 신청을 해야 한다.
영어학교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학생으로 왔다 가곤 했다. 주로 한국이나 중국, 일본이나 대만 같은 아시아 사람들은 워낙 거리가 멀고 비행기 값이 비싸서 그런지... 최소 3개월-4개월 정도 오래 공부하곤 했다. 반면 유럽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2주 정도 짧게 와서 영어 공부를 빙자한 런던 관광을 하고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국적도 다양했다. 중국, 태국, 대만, 일본, 스위스, 프랑스, 러시아, 라트비아, 독일, 슬로바키아, 터키, 사우디 아라비아, 리비아, 이라크...
그중 꽤 기억이 남는 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모하메드였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땅값 비싼 런던 중심부의 실내 수영장이 딸린(!) 주상복합 아파트에 혼자 살던 모하메드. 수도꼭지에 금도금을 한 욕조를 두 개나 갖추고, 열심히 로스트 치킨을 썰어서 지중해 대추와 함께 점심을 대접하던, 대체 직업이 뭔지 짐작도 안 되는 모하메드... 그리고 영어 코스 마지막 날에, 이대로 끝내기 어렵다며 근처 가게에서 도넛과 음료를 잔뜩 사 와서 클래스 친구들과 같이 나눠먹던 인심 좋던 모하메드...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연락이 끊겼지만, 그때 저장해 놓은 모하메드의 전화번호를 가끔 보면서 요즘 뭐 하고 살지 궁금해하곤 했다.
대학원 공부보다 힘들었던 영어공부
사실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영어 공부가 대학원 생활보다 훨씬 힘들었다. 어떤 사람은 어학에 재능이 있어 일찍이 그걸로 먹고산다지만 난 그게 아니지 않은가? 수능 볼 때도 수학 다음으로 가장 어려웠던 게 영어였다. 그 정도로 정말 영어에 자신이 없었는데 어쨌든 미술공부를 하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고 하니... 그 자격 요건을 갖추는 게 정말 너무 어려웠다. 영국 오자마자 펑펑 놀다가 막바지에 3-4개월 안에 원하는 점수를 만들려니 죽을 맛이었다. 나처럼 이런 문제 때문에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로 반 친구들 앞에서 엉엉 울던 한국인 친구가 생각난다. 그래서 결국 고민을 하다가, 아이엘츠 점수를 최대한으로 맞춰서 내고, 부족한 영어 실력을 대학원의 Pre-sessional 코스로 만회하기로 했다.
대학원 첫 관문, Pre-sessional 코스
그럼 이 프리세셔널 코스에서는 무얼 듣느냐 하면... 영어 에세이를 한편 쓰고, 그걸 여러 번 첨삭하고 다듬어서 마지막에는 반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 신기하게도 예전에 있었던 윔블던 어학원 아이엘츠 반을 담당했던 야스민(Yasmin) 선생님이 있었는데, 내가 다닐 킹스턴 대학의 프리세셔널 코스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바로, 내 반에서 말이다! 덕분에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인연인 것 같다.
이 반에서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마카오 친구 Gladys, 터키에서 온 친구 Charlie를 처음 만나게 됐다. 어학원에서는 그냥 어학만 배우고 돌아가는 직장인들, 방학을 끼고 관광온 10대 아이들이나 아주 단기로 왔다가 돌아가는 철새 같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코스에 오면서 비로소 나와 똑같이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훨씬 숨통이 틔였다. 그렇게 어학원에서 나를 스쳐 지나간 많은 친구들, 지금은 뭐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