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을 깨야 길이 열린다

by jjin

기록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들을 하나씩 돌아보면, 그 모든 이유들이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는 기록을 못 해서 멈춘 게 아니었습니다. 게을러서도 아니었고,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기록 앞에서 계속 멈춰 섰던 이유는, 그동안 너무 많은 마음의 장벽을 혼자서 넘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깨끗하게 읽어야 한다는 강박, 줄을 긋는 것조차 망설이게 만들던 불안, 글을 쓰려하면 괜히 움츠러들던 마음, 잘 써야 한다는 부담, 남과 비교하며 흔들리던 자존감,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생기던 막막함까지. 그 어느 하나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록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기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기록은 원래 조용한 일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잘해야 하는 일이 되었고, 꾸준해야 하는 일이 되었고, 성장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록은 점점 무거워졌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기록을 멈춘 자신을 또다시 탓하며, 다시 시작하는 건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기록은 늘 ‘해야 하는데 못 하는 것’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장벽을 돌아보고 나니, 이제는 조금 다른 시선이 생깁니다. 기록을 못 했던 시간들은 실패가 아니라, 버티고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못한 날들도 사실은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잠시 멈춰 있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기록은 늘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곤 했지만, 그만큼 기록은 삶이 힘들어질 때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기록이 자주 끊어졌다는 사실은, 그동안 삶이 얼마나 벅찼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기록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들은, 기록을 하기 싫어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기록이 나를 살게 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졌던 것입니다. 잘하고 싶었고, 제대로 하고 싶었고, 의미 있게 남기고 싶었기에 쉽게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은 부족함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기록 앞에서 멈춰 섰던 시간들은 그래서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 덕분에 우리는 이제 안 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 책에 줄을 긋지 못했는지, 왜 노트 앞에서 손이 굳어버렸는지, 왜 자꾸만 남의 기록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는지, 왜 몇 번이나 시작했다가 멈추게 되었는지. 그 모든 이유들은 이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막연한 자책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기록은 다시 다른 얼굴로 다가옵니다. 기록은 더 이상 넘어서야 할 장벽이 아니라, 이제 천천히 걸어가도 되는 길처럼 느껴집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록을 시작하기 위해 너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가짐도 단단해야 하고, 시간도 확보해야 하고, 방법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장벽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나니, 기록을 시작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기록은 준비가 끝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마음이 어지러울 때, 삶이 흔들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기록이었습니다. 기록은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엉킨 상태에서 시작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내가 부족하다고 느껴질수록, 기록은 더 조용히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제는 기록을 앞에 두고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엔 꼭 잘해야지”라고 다짐하지 않아도 되고, “이번엔 오래가야지”라고 마음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동안 안 됐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그 자체로 이미 많은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기록은 나를 다그치지 않아도, 다시 돌아올 자리를 남겨줍니다.


그래서 이 꼭지의 끝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합니다. 이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기록을 가로막던 장벽들을 하나씩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 장벽을 억지로 부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길은 열려 있습니다. 그 길은 빠르게 달려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멈췄다 다시 걸어도 되는 길입니다. 기록은 그런 길입니다.


이제 해도 됩니다. 더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더 꾸준해지겠다고 약속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지금의 상태로, 지금의 마음으로 시작해도 됩니다. 기록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몇 번을 떠났다가 돌아와도,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기록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록 앞에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아도 됩니다. “왜 나는 이것밖에 못 할까”라는 질문 대신 “그래서 내가 그동안 많이 버거웠구나”라고 말해볼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에 닿는 순간, 기록은 이미 예전과 다른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기록을 가로막던 이유들을 이해하고 나면, 기록은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이 아닙니다. 넘어야 할 벽도 아니고, 증명해야 할 과제도 아닙니다. 그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리, 삶이 어지러워질 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잘 해내지 않아도 되고, 오래 이어가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라는 걸 알게 되면 기록은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아도 조용히 손에 잡힙니다.


이제는 기록을 시작하기 위해 더 많은 각오를 다질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의 마음이 조금 무겁더라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도, 그대로 기록의 출발점이 되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언제나 준비된 마음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기록은 다시 다른 얼굴로 다가옵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해도 괜찮은 일로. 버텨야 하는 습관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리고 그 변화는 아주 조용히 시작됩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변화들로. 기록이 다시 삶 안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그 변화를 뒤늦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 내가 조금 달라졌구나.”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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