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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있다는 착각

by 한걸음씩

35년.

여기까지인걸까.

'나의 결혼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브런치북을 완성하면서 나름대로 평범한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자들이 내 글을 로맨틱 코미디처럼 읽고 후기를 남기니 나도 재미있게 사는 줄 알았다.


올해 초 남편은 도박중독의 증세가 갑자기 심해졌다.

1년 내내 도박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평일엔 일하고 주말만 외박하는 정도였는데 올해는 도박장에서 밤새는 날이 많아졌다.

협박, 회유, 애원등 어떤 방법에도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남편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마음이라도 안다면 내가 이렇게 불안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상담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노발대발 하는 남편과 함께 가는건 불가능 하고, 그렇다고 나 혼자 정신과를 찾는 건 임시방편일 뿐이니 어째야 하나 했다.

고민 끝에 용기 내어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냈다.

요즘 방송에서 인기몰이하고 있는 심리상담학 교수가 전화 상담을 해주는 방송이었는데 남편의 이야기를 써 보냈다.

익명이긴 하지만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혹시나 나를 알아보는 건 아닐까, 전화 목소리를 듣고 눈치채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전문가에게 꼭 한번 진단을 받아 보고 싶었다.


내 사연은 바로 채택 됐다.

방송작가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00 프로 아시죠? 000 작가입니다. 보내신 사연이 채택이 됐는데 혹시 방송 중 전화 상담이 가능하실까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작가 전화에도 이렇게 벌벌 떨리는데, 본방송은 어떻게 하지?

게다가 생방송이라 실수라도 하면 안 될 텐데.

그래도 내가 왕년에 발표 왕이었잖아. 잘할 수 있을 거야.


"네. 익명이면 가능해요."

돈주고도 못 받는 유명한 교수에게 무료 상담을 받는데 그깟 방송쯤이야...


2주 후로 잡힌 상담일을 손꼽아가며 기다렸다.

드디어 당일.

좀 일찍 퇴근하여 차에서 전화를 기다렸다.

작가에게 먼저 전화가 왔다.


"진행자가 '전화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라고 하면 그때부터 말씀 시작하시면 됩니다.

라디오는 꺼주시고요."

전화기에서는 라디오를 켜 놓은 것처럼 방송 내용이 그대로 들렸다.

조금 지나니 진행자가 말했다.


" 자, 그럼 사연자와 직접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신기하게 떨림은 하나도 없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걸 방송체질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보낸 사연을 바탕으로 만든 짧은 콩트가 나가고 난 뒤 이어진 전화 상담이다.

교수의 몇 가지 질문에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대로 대답했다.

20여분 통화를 하고 난 후, 교수는 나에게 '공동의존증'이라는 말을 했다.

매우 심각하며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듯 하니 꼭 상담하기를 권한다는 처방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 순간 당황스러워서 아무 대답을 못했다.

진행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상담받아보시니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입 다물고 듣고 있는 나에게 진행자가 물었다.


"제가 생각했던 답이 아니라 좀 당황스럽네요.

하지만 상담을 받아 보라고 하니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괜한 짓을 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상담요청을 한 목적은 전문가를 통해 남편의 속마음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남편의 마음을 알면 아무래도 현실을 견뎌 내는 것이 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은 그냥 도박중독일 뿐이고 그 원인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결혼 전부터 도박을 했었다는 시누이의 말이 떠올랐다.

신혼기간 동안 남편이 도박장에 다니지 않았기에 남편에게 그것이 심각한 중독인지 몰랐다.

중독이 끊어지려면 중독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데 신혼 기간이 남편에게는 도박 휴지기였나 보다.


'아... 그럼 내가 뭘 해도 남편은 달라질 수 없는 거구나.'

내가 고장이 난 것이니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에 온몸의 기력이 툭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담 전보다 내 기분은 더 안 좋아졌다.

나아질 거라며 붙들고 있던 가느다란 희망의 줄이 허상이었다니...


그날부터 남편이 달라 보였다.

남편이 외박해도 나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외박의 당사자보다 내가 더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게 병이라고 한다.

남편은 그냥 중독이고, 그걸 즐기고 있는 거라고 하니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집이 즐겁지 않아서 나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도박중독은 나의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니 지금까지 참고 지켜온 가정이 지진처럼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하지...

이대로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나.

이혼은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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