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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다면 과감하게

by 한걸음씩

신경정신과 진료받을 때 가장 귀찮은 건 초진이다.

이런저런 검사와 설문지를 작성하다 보면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생활기록부처럼 나에 대한 상담일지 같은 걸 갖고 다녔으면 좋겠다.

그러나 병원도 돈을 벌어야 하고, 무엇보다 남의 의견이 아닌 자신이 살펴야 할 게 있을 테니까.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에 방문했다.

차갑고 건조한 인상의 데스크 직원들과 달리 의사는 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긴 머리를 한쪽 어깨로 내리고 앉아 있는 30대 후반의 그녀는 친절한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분위기였다.

첫 상담일은 상담시간이 좀 길어서 내 상태를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눈물이 나서 책상 위의 티슈를 두세 번 꺼내 썼다.


"스트레스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좋게 나왔네요."

그럴 것이다.

나는 뭐든 속에 담아 두지 않고 토해내는 편이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유일한 곳이 직장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참는 것은 아니다.

수면장애가 좀 있고, 무기력 때문에 의욕상실과 대인기피가 있다고 했더니 필요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봉투를 받아 들고 나오는데 갑자가 화가 났다.

남편에게 도박, 술, 담배등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신경정신과나 상담소에 가보자고 하면 그는 늘 그랬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끊을 수 있어! 상담은 무슨 상담이야? 내가 뭐가 문제가 있다고!"

문제의 인식이 선행되어야 상담이고 뭐고 진행이 될 텐데 남편은 항상 자기가 옳았다.

그러니 아쉬운 내가 약을 먹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이었다.

가끔 내가 화를 내면 남편은 오히려 나에게 '약 좀 먹어!' 라며 짜증을 냈다.


이번에도 결국 내가 병원을 찾게 된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니까...


사실 신경정신과는 상담을 하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의사의 피드백은 항상 갈증을 느끼게 한다.

시원하게 내 상태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고, 격한 공감으로 시원함을 주는 일도 없다.

그저 들쭉날쭉 롤러코스트를 타는 현재의 기분을 약물로 진정시키는 정도다.

상담은 상담 전문가가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방송 상담에서 권면을 받은 대로 지역의 가족상담센터 예약도 했다.

무료 상담이라서인지 상담 예약이 밀려서 가장 빠른 날이 두 달 후라고 했다.

기다리다 보면 그날이 오겠지.


약도 좋고, 상담도 좋은데 개선의 의지가 전혀 없는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과 대화를 하려고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대화의 방식이 어떠하든지 결과는 나의 포기, 패배로 끝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공연히 힘만 빼는 싸움으로 결론이 나면 남편은 냉전을 핑계로 생활비를 안 준다.

반복되는 이 상황에 이제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부터 마인드 컨트롤 하며 내 몸에 에너지를 쌓았다.

감정이 요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를 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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