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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싸놨어. 가져가

by 한걸음씩

석 달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꼴도 보기 싫은 남편을 오늘 하루만 견뎌보자 하는 마음으로 날짜를 손으로 꼽으며 지내자니 마치 출소를 앞둔 죄수처럼 더디기만 했다.

지루하게 또 한 달이 지나고 마지막 한 달전 남편에게 또 문자를 했다.

이번에도 단호하게.


-한 달 남았어. 잊지 않았지?


여전히 남편은 내 문자에 무응답이다.

답장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지.

내 문자를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한 달 뒤에 나는 통쾌하게 남편을 내쫓는 것으로 복수 할것이다.

그때까지는 어쨌든 지금의 조용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직장에 다녔기 망정이지, 전업주부였더라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그나마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고, 매주 한 번씩 상담을 받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다.

변함없이 내 속을 뒤집는 남편의 행동은 고맙게도 나의 결심을 확고하게 다지는 역할을 해줬다.


상담사는 내가 혹시나 또 마음이 약해져서 그만둔다고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 같았다.

60년 동안 피부처럼 붙어 있던 습관을 바꾸는 일이니 바짝 신경 쓰지 않으면 금세라도 이 어색한 것을 그만둘 것 같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력감이 올라와 치료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으니까.


-이번엔 정말 제 마음 확고해요.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때마다 나도 강하게 내 의지를 밝혔고 스스로도 그래야 한다며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시간을 흐르고 흘러 남편의 독립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주 토요일이야. 약속 지켜.


문자를 보내고 난 후 일주일은 이미 지나간 두 달 반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이렇게까지 하면 남편도 내가 뭔가 행동으로 옮길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줄 알았는데, 이 남자 생각은 하고 사는지 초지일관 변함이 없다.

오히려 안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내가 걱정하는 상태가 됐다.


드디어 D-day.

당일이 되었는데 남편은 꿋꿋했다.

아침에 일어나 찌개를 끓여 먹고, 다음에 먹을 요량으로 남은 찌개를 냉장고에 넣고 그의 오락실인 도박장으로 향했다.

토요일이니 외박은 당연하고 일요일 저녁에나 들어올텐데 남편은 저 찌개를 다음날 먹겠다고 넣었다는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에 대해 남편이 적지 않게 당황할 모습이 상상되어 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당한 것에 대해 나는 복수의 한방, 강펀치를 날릴 때가 됐다.


남편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삿짐 박스에 넣으니 두 박스면 충분했다.

문 앞 복도에 내놓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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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싸놨어. 아무 때나 가져가. 현관 비번은 자정 지나면 바꿀 거야.


남편은 그날 들어오지 않았다.

짐도 가져가지 않고 하루, 이틀 날짜만 지나갔다.

우연히 옆집 아주머니를 마주쳤는데 집 앞 박스를 보고 이사 가는 줄 알았다고 해서 옷정리 중이라며 얼버무렸다.

평소 남편이라면 옷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옷을 가져가는 순간 나와 관계가 정말 정리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 독립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여길 수도 있고, 자존심이나 귀찮음 때문일 수도 있다.


-복도에 오래 둘 수 없어서 배전함에 넣어놨어.


친절하게 읽으면 친절하게 들릴 테고, 냉정하게 보면 한없이 차가운 문자.

표정 없는 문자에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매 순간 남편의 마음이 궁금하고 안부가 걱정되니 어찌 보면 남편보다 내가 준비가 안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사나흘정도 지났을까?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한테 전화해봤어. 그런데 아빠 아주 해맑게 받던데? 잘 지내냐고 했더니 새장가가야겠다고 농담까지 하면서.


남편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오히려 평소보다 텐션을 올리는 건 남편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을 때 나오는 방어기제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 날 저녁이었다.

편의점에 가느라 저녁 늦게 현관을 나서는데 평소 남편이 주차하던 자리에 떡하니 남편차가 있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게 이렇게 겁먹을 일인가?

뒤쪽으로 돌아가며 차 안을 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길이 엇갈려서 그사이 집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놀이터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유튜브영상을 보고 있는 남편을 발견하고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얼른 집으로 올라갔다.


-아빠 지금 놀이터에 앉아서 휴대폰 하고 있어. 엄마가 아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엄마는 이렇게 소심해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았어? 뭘 그렇게 놀라?


며칠 동안 남편이 혹시 술에 취해 고성방가 하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접근금지 신청을 해야겠다고 마음으로는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으나 소용없었다.

남편이 주차장에 주차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방망이 질을 해대니 신고는 무슨.


얼른 불을 끄고 자자고 딸에게 말하고 나도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고 그날 밤 남편은 집에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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