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능 감각자에게 내리는 처방전
존재감은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내면이란 실제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타인의 표면에 부여하는 해석의 밀도인가.
우리를 자극하는 사람은 깊은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가 해석할 여지를 과도하게 남기는 사람인가.
생각은 실제로 있는 것인가?
인식은 나인가?
의식은 우주를 흘러가는 어떤 에너지 장일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투명한 거지"
투명성은
저항 없음, 걸림 없음, 해석할 돌기 없음이다.
이런 인물은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요철로 감지되지 않는 존재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깊다'라고 말할 때,
실제로는 그 깊이를 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유발되는 해석량을 깊이로 착각한다.
불투명한 사람,
상처 많은 사람,
말과 감정의 결이 복잡한 사람은
우리 안에 더 많은 추측과 상상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깊어 보인다.
감정적 후킹 포인트를 던지지 않는 존재.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는 과잉해석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을 미치게 하는 존재를 특별하다고 믿지만,
실제로 특별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신경계를 자극한 방식일 경우가 많다.
고기능 감각자의 세계 인식 방식은
타인의 표정, 기류, 통증, 압박감, 말의 결, 순간의 밀도를 과잉수신하는 사람의 존재 방식이다.
이런 고기능 감각자에게 편안한 존재는
하나의 기능이기도 하다.
자극이 없는 상태의 표상
신경계에 안전한 존재의 모델이 된다.
타인을 통해
사실은 자기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불교적 공과 신경과학적 안전감이 만나는 지점
불교적 공성의 언어는,
실체화된 자아, 감정의 찌꺼기, 집착, 자기 서사의 덩어리가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니 가볍고, 걸림 없고, 잡히지 않는다.
방어적 신호를 뿜지 않는 사람,
상대의 애착 시스템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는 사람.
불안정 애착의 고리를 만들지 않는 사람.
보통 사람들은 강렬한 자극을 사랑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신경계를 긁지 않는 만남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소모시키는 강렬함을 깊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는 선언이기도 하다.
과잉해석형 인간은 경험하기 전에 이미 의미를 과도하게 생성한다.
만나기 전부터 피곤하고,
가능성을 계산하고,
위험을 예측하고,
감정적 비용을 산출한다.
그러니 삶은 체험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이 된다.
그러나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과도한 의미화에 대한 정지 명령이다.
삶을 내면에서만 처리하지 말고,
바깥의 사건으로 흘려보내는 일이다.
내 신경계는 너무 많은 것을 읽는다.
그러니 이번에는 읽기보다 지나가 보라.
이것은 굉장히 깊은 처방이다.
과민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추가 해석이 아니라
때로는 의미를 생성하지 않은 채 경험을 통과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