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되지 않는 것들
“곱슬머리부터 전세사기까지! 소화불량 내향인의 야금야금 일상 쪼개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웃기고 슬픈 인생을 어떻게 소화하고 넘길까? 도대체 남들은 어떻게 하는 거지? 매일 하루가 내겐 감당하지 못할 큰 덩어리로 보였다. 벅차고 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그 ‘것(gut-소화관)’들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어릴 때부터 소화 불량을 자주 앓았다. 소화력과 위장이 약한데 식탐은 또 많아서. 먹고 싶은 만큼 먹으면 어김없이 탈이 났다. 위산이 역류하는 느낌에 목에서부터 턱 걸려 내려가질 않았다. 소화제와 가스 활명수를 먹으면 기분은 나아졌지만 걷고 제자리를 뛰어도 배가 더부룩했다.
대학생 때 삼겹살집에 가서는 크게 체한 적도 있다. 2인분도 안 먹었는데… 참다못해 새벽에 응급실에 갔다. 명치를 쳐도 얹힌 게 안 내려가고 괴로워서 눈물이 줄줄 났다. 그렇게 한번 크게 체한 후론 자주 뭐가 걸렸다. 피자 한 조각을 먹고 응급실에 갔더니 간호사가 되물었다.
“피자 한 조각이요? 한 판 말고, 한 조각 드신 거 맞죠?”
그 한 조각은 농축된 무언가였다. 튀긴 밀가루, 치즈, 고기 등이 밀도감 있게 뭉친. 먹방 유튜버는 꿈도 못 꿀 허접하고 나약한 나의 위장. 이젠 정말 속 편한 음식 위주로 소식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욕심이 과하거나 생각에 과부하가 걸리면 바로 체기로 나타났다. 예민한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는 듯했다. 실제로 요즘은 장과 뇌가 연결돼있다는 의학 연구도 많고. 마음에 맺힌 걸 각 잡고 넘기는 기간이 필요했지만, 바쁜 현대 사회에 적응하려면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결정하고 나아가기보다 회피하고 탈출하는 거였다.
30대 중반이 돼서야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지난 상처들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 사람, 진로, 사회 등이 모두 버거웠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상담 시간에 나는 이 단어를 자주 말하고 있었다.
‘소화.’
“제가 기록 강박이 좀 있거든요? 사진을 엄청 찍고 기록도 방대하게 해요. 그래야 좀 생각이 덜어지더라고요. 과거 일들도 아직 소화를 못 시켰는데 시간은 빨리 가고, 그럼 현재를 따라가기에 벅차고… 그나마 기록하면서 앞으로 가는 것 같아요.”
상담 선생님은 그걸 숨은 욕구와 연결해 주었다.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거네요. 어릴 적 사회나 부모님이 주입하는 남의 언어로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잖아요. 그러면 흔들리고 주관 잡기가 힘든데, 어릴 때부터 기록하면서 내 인생에 대한 방향을 잡았나 봐요.”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어떤 기억은 소화되지 않고 내내 남는 걸까? 어떤 말이 몇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까? 흡수가 안 된 채 토해지는 건 뭐지? 가끔은 내게 행운이 찾아와도 그걸 믿을 수 없어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행복을 맛보기 전에 눌러버렸다. 현재를 누리기보다 과거의 기억들에 자주 발목 잡히고 그 잔상을 보는 사람이 나였다.
혹시 본인이나 주변 누군가가 생각나시는지? 예민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 자주 얹히고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 이상할 건 없다. 요즘은 체하기 딱 좋은 과잉의 시대니까. 이런 분들과는 건강한 소화를 도모하고 싶어진다. 내가 찾은 해법은 이것이다. 작은 단위로 만들어서 넘기기. 잘게 쪼개서 천천히 소화하기. 말을 꺼내고 글로 써보기.
그렇게 매일 야금야금 살아본다. 하루에 30분씩 영어 공부, 20분씩 근력 운동을 하고 1시간에 6권을 병렬 독서한다. 유튜브 영상은 한 채널당 5분씩만 보고, 작업할 때는 여러 파일을 띄워놓고 조금씩 고치는 식이다. 나같이 관심사가 많고 조금씩만 삼켜지는 사람을 위한 ‘병렬’ 라이프스타일이다.
약국에서 수많은 약들이 칸칸이 서랍 안에 분류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약사들은 나름의 분류법에 의해 조제된 약들을 빠르게 찾아준다. 환자는 아침, 저녁 약봉지에 나뉘어 담긴 걸 꺼내 삼키기만 하면 된다. 글과 기록은 내 알약들이다. 각자 꼬리표를 단 그것들이 감정을 쉽게 넘기도록 해준다. 약봉지엔 약들 이름(제목)이 있고 키워드(주제)가 있고 설명(본문)이 쓰여있다. 언제나 약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예전엔 목적을 모르고 글 쓰고 기록했다면 이제는 조금 목적을 알게 됐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단단해지려고. 그러려면 거리감을 두고 찬찬히 만져줘야 한다. 소화를 돕는 혈 자리가 위장과 멀리 떨어진 손가락 끝이나 발바닥에 있는 것처럼.
곱슬거리는, 신점 결과, 짜고 뜨거운, 침묵 속 사무실, 첫사랑, 비싼 디저트, 전단지 알바, 예측 안 되는 진로, 이름들... 여러 꽉 막힌 것들을 담고 뚫어보고 싶다. 파도가 쓸어가도 남아있는 조개껍질처럼, 가라앉고 떠오르는 순간들을 들여다본다. 때론 경쾌하게 농담도 치면서. 그러면 조금은 소화력이 강해질 것도 같다. 당신의 소화되지 않는 것들도 듣고 대화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