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잠깐 떠남을 반복하며 해독하는 힘, 인생의 밸런스를 찾는 유럽 혼자 여행기”
어릴 때부터 염증을 자주 앓았다. 몸과 마음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염증이 생겼다. 한포진, 비염, 고름, 질염, 감기, 구내염, 치주염 등 다양한 증상들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몸이 소리 지르는 걸 들었지만 여전히 회사를 다닐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일상에서 쌓인 걸 해독할 시공간이 필요해지면 주기적으로 떠나야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이지 바가 있어서 매일 1mm씩 차오르는 것처럼. 그게 꽉 차기 직전엔 경고음이 울렸다. 몸의 질환으로 돋아났다.
체력도 매우 약해 골골대는 통에 별명도 ‘종합병원’이었다. 30대 들어서는 더해졌는데, 롯데월드에서 몇 시간 놀았다고 쓰러질 뻔한 적도 있다.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 등에서 곪아온 마음은 툭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분노나 우울로 팽팽하게 차 있었다.
그런 내가 여행만 가면 갓 물을 준 새싹처럼 살아났다. 마음은 유순해지고 생명력이 꺼져 시들해지던 잎사귀가 팽팽하게 빛났다. 내내 흐리던 날씨에 파란 하늘과 해가 뜬 것처럼. 그러고 나서 일상에 돌아오면 얼마간은 그 밝은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 시들어버리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면 여행가는 게 소용없지 않냐고? 나는 이 여행이 주는 맑은 기간을 늘리고 일상에서도 유지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 달 살기보다는,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바람만 쐬고 오는 식으로. 효과를 제대로 보기 위해 혼자 간헐적으로 여행을 다닌 지 10년, 총 26개국에 갔다.
유럽은 내가 처음 혼자 떠난 곳이다. 나는 그 이국적인 대륙과 단박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후로 직장 연차와 명절을 이용해 자주 유럽을 다녔다. 유럽 전체가 거대한 한 덩어리로 느껴졌고, 또 도시마다 개별적인 나라로도 느껴졌다. 역사가 오래되고 보존이 잘 되어있어서, 또 문화적 레퍼런스가 풍부해서, 자연과 햇살과 여유가 있는 곳이어서 질릴 틈이 없었다. 서로 앙숙 관계인 나라도 있었고, 구별되지 않게 모호한 나라도 있었고, 국가로 묶여있지만 독립을 원하며 적대감을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 사이로 쏘다니며 나라 간 관계와 영향을 파악해 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강대국들의 이면들을 생각하며 씁쓸해지기도 했지만. 체류 기간은 짧았어도 깊게 느끼려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내 상처와 고민이 잊히곤 했다. 사람들을 만나며 웃기고 짠한 에피소드들도 생겼다.
이 여행을 떠났던 목적은 뭘까? 물론 즐기고 휴양도 했지만, 뭔가 배우고 얻어오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전이나 이동 시간에, 혼자만의 정리와 기록 시간을 만들었다. 거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고민을 끄적이기도 했다. 평소에 봐넘기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면 뚫리기도 했으니까. 일상에서 생각은 가볍고 잘 휘발되는데, 여행은 그걸 좀 붙들어 매고 전환점을 마련해주고 중심을 잡아줬다. 외국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 활력, 비상함, 예민한 감각, 행복감으로 찬 – 자아가 깜깜한 앞길을 밝히고 대신 헤쳐 나갈 거라고 믿게 됐다. 한층 선명해진 눈과 귀로.
외국에 나가면 현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언어들은 낯설게 들리고, 상대의 표정과 분위기로 짐작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들. 그것은 어렵지만 즐거웠다. 먼 이국의 사람들을 보면 내가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가 보였다.
근데 이걸 비싸고 번거로운 해외여행으로만 이룰 수 있나? 국내 여행하면 되지 않나?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가 안되는 것 같다. 무리를 해서라도 낯선 곳으로, 스트레스 요소로부터 멀리 떠나는 게 내겐 유효한 방법이었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모험, 탐험에 대한 욕구가 크기도 하고 말이다.
모험하고 걸으면서 직접 본 지구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도 여행기의 순기능일 것이다. 기후 과학자들에 따르면 2050년에 북극곰이 멸종하고 북극이 없어지면 여러 나라도 없어진다고 한다. 사라져가기 전에 숨어있는 풍경과 사람들을 많이 담고 싶다. 지구와 미래의 사람들을 향하면서.
여행과 날씨는 인생과도 같다. 우중충한 일상을 벗어나면 거리감이 생긴다. 그 틈으로 맑게 갠 하늘이 보이기도 한다. 여행에는 기대가 따르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틀어지며 내려놓는 연습을 하게 된다. 항상 좋지는 않지만 잠깐씩 밝은 순간들을 발견하고 그걸 오래 지속하려 한다. 일상과 여행 사이에서 밸런스를 찾아가며. 잠깐도 반복하면 힘이 된다는 걸, 나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도 싶다. 개인의 상처보다 큰 세상을. 삶과 지구는 이렇게 넓고 다양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