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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01. 2024

템플바 속 템플바

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결혼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시점에서 또 혼자 여행길에 오른 참이었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전혀 아니었다. 단지 회사를 그만둔 기념으로 퇴사 여행을 떠난 것뿐. 전 회사에서는 5년 이상 근무했다. 한곳에 머무는 동안 쌓인 독소가 많았기 때문에 그걸 털어내는 의례가 필요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여행밖에 없었다. 받은 퇴직금 일부를 헐고, 2주 간의 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길게 남미에 가려고 했지만 남편은 너무 위험하다며, 총 맞을 수 있다며 극구 말렸다. 그래서 또 만만한 유럽으로 왔다. 안 가본 곳들만 쏙쏙 골라서. 그렇게 듬성듬성 코스를 짜보니 비효율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동선이 완성돼 버렸지만. 그 첫 번째 코스가 아일랜드였다. 


왜 그렇게 구석진 곳까지 갔냐 하면… 아일랜드도 독립운동을 했었다는 점에서 내적 친밀감이 들었고, 켈트족의 아이리시 음악을 들으면서 평화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장인일 때는 사무실의 흰색과 회색만 보며 매일을 보냈다. 이제 초록색 풍경들을 자주 보고 싶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부터 초록색 기운이 맞아주었다. 이곳의 초록은 유난히 밝은 색으로 보인다. 국가의 상징인 세잎클로버가 여기저기 보였다. 여행하는 건 마치 희귀한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모험을 떠나야지. 장화를 신고, 게르만족 특유의 수염을 기르고 뚜벅뚜벅. 아일랜드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여권 도장도 초록색으로 찍혔다. 초록 나라로 향하는 허락을 받은 럭키한 기분이었다. 



더블린은 ‘초록색으로 물든 도시(Greening the City)’라고 불릴 때가 있다. 매년 3월 17일쯤 5일간 열리는 ‘세인트 패트릭스데이(St. Patric’s day)’ 축제 주간. 수호성인인 패트릭을 기념하는 기간에 온 시민들이 초록색 옷과 모자를 쓰고 퍼레이드를 한다고. 아쉽게도 내가 온 건 9월의 가을이라 단풍이 들락 말락 하는 때였다. 나는 얼룩진 초록색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더블린에선 1박만 하는 미친 스케줄이라, 서둘러 밤을 즐겨야 했다. 호스텔에 짐을 풀자마자 거리로 뛰쳐나갔다. 트램들을 지나쳐 템블 바 구역으로 향했다. 아일랜드의 명물인 맥주를 맛보려면 ‘템플 바 Temple bar’로 가면 된다. 웬 절 같은 이름이냐고? 나도 처음엔 펍 한 곳의 특이한 이름인 줄 알았지만, 그건 구역 전체를 부르는 말이다. 템플 바(구역) 안에 또 ‘템플 바(특정 술집)’가 있는 것. 리피강 남안에 문화 기구와 나이트클럽, 여러 펍들이 몰려있다. 밤마다 고성방가로 문제가 많다는데… 더더욱 안 가볼 수 없었다. 



템플바 구역은 생각보다 짧았고 어느 대학 가 골목 정도였다. 월요일 밤 10시인데도 늦게까지 노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새 빨간색 페인트로 여러 겹이 칠해진 외관에 노란색 글씨로 ‘THE TEMPLE BAR’가 적혀있다. 모두 대문자다. 18-19세기 전통 펍 같이 생겨 아날로그적인 느낌이었다. 이웃한 펍들은 모두 다른 색 외관이었는데, 초록색도 남색도 있었다. 


여러 펍을 기웃거리며 분위기를 간 봤다. 본격적으로 맥주를 시켜버리면 한곳에 정착해야 할 것 같아서. 호핑 투어를 하듯 5분씩 펍을 옮겨 다녔다. 펍마다 손님을 끌어모으는 비기가 있어 보였는데, 바로 공연이었다. 기타와 노래, 라이브 공연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거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음악 소리에 이끌려 들어오고 스탠딩으로 즐기거나 바 자리에 앉아서 박수를 쳤다.



 한 펍에 들어가 앉았다. 모든 테이블에선 약속이나 한 듯이 맥주를 마시고, 아이리쉬 포크송을 기타 치면서 부르는 연주자들. 모르는 노래여도 흥이 나는 리듬이었다. 각 나라의 전통 음악들은 조금씩 닮아있어 외부인에게도 친숙하게 들리니까. 신이 난 사람들이 격렬하게 스텝을 밟고 몸을 흔들었다. 10대 소년들도 티셔츠를 벗어제끼며 춤추면서 떼창을 했다. 아이리시의 흥이란 클럽보다 핫한거였구나…! 


이곳에 정착하고 싶어진 나는 드디어 맥주 한 잔을 시키고 그 광경을 즐겁게 지켜봤다. 다들 오래 묵은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는 듯했다. 퇴사하고 나서의 계획은 막막하지만 생각에 잠기는 대신 발로 장단을 맞췄다. 가사를 못 따라 부르는 대신 따라 웃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 아까 나도 춤출걸' 후회하는 나. 나는 왜 내향인인 걸까. 신호등을 건너려면 버튼을 눌러야 켜졌다. 이걸 몰라서 한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는 표시로 애꿎은 버튼을 몇 번 세게 두드렸다. 거리에 사람도 없고 차도 없었지만 무단횡단은 안 하고 싶다. 그건 외국인,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일지 모른다. 


길을 건너며 더블린의 표지판들을 유심히 보니 Quay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고, 사람 이름 (토마스, 제임스 등)이 들어간 거리 이름도 많았다. 이름들도 뭔가 영국보다 소박한 분위기가 났다. 가톨릭 이름인 토마스가 정겹게 들리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에디슨, 눈이 땡그란 토마스 기차… 



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야경이 아담하고 소박했다. 한강의 1/10이나 될까? 리피강은 폭이 좁았고 가로등이 주황색으로 비친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 고요한 풍경에 멈춰서서 음악 앱을 켰다. 폰이 강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으로 턱을 괴고 강을 바라봤다. Irish folk song을 검색해 플레이리스트를 한참 들었다. 그 나라에 가장 빠르게 흡수될 수 있는 법은 그곳의 민속 음악을 듣는 것이다. 몇 분 만에 그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는 나의 비법(?)이다. 



아일랜드 민속음악은 경쾌하고도 처연했다. 선율은 박수 소리처럼 통통 튀는데 그 흐름은 끊어질 듯 이어져서 감정선이 머무는 느낌이었다. 3곡째 들을 때쯤 이제 그만 가고 싶기도 했고 여기에 더 머물러 있고 싶기도 했다. 몇 곡째에 숙소로 들어갈까? 이것까지만 듣고… 같은 생각만 머릿속을 채웠고 그밖에 결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펍을 나와서 시작되는 나만의 공연이었다. 당장 마실 맥주잔은 없었지만 맥주를 마신 뒤끝이라도 좋았다. 


회사에서 있던 많은 일들이 떠내려가는 듯했다. 누군가가 리스트로 모아놓은 아일랜드풍 음악들은 자동으로 재생되고, 나는 지금 보이는 물결에 귀를 맡기고 떠갔다. 템플바 속엔 템플바가 있고, 내 속에도 템플바가 있는 것 같았다. 초록색 간판들은 이제 검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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