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들의 새로운 미래

기계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삐뚤빼뚤한 온기의 미학

by 스틸앨리스

기계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삐뚤빼뚤한 온기의 미학

조급함이 찾아오는 시대

요즘 부쩍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다.

AI가 순식간에 완벽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정교한 알고리즘이 내 취향을 분석해 다음 소비를 예측하는 시대. 클릭 한 번으로 수천 장의 패턴이 생성되고, 단 몇 초 만에 그럴듯한 디자인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처음엔 신기했고 그다음엔 편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묘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이 인간"이라는 책 속의 문장을 마주했을 때

인간과 기계 사이 어딘가에 끼어 있는 존재로서의 우리를 이야기하는 그 문장들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창작자인 나의 마음 깊은 곳을 정확히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기계가 만들어내는 것들 사이에서 내가 만드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질문은 꽤 오래,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믿는 아름다움의 기준

하지만 가만히 바늘을 잡고 원단을 마주하다 보면, 결국 내가 믿는 아름다움의 본질로

되돌아오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내가 생각하는 미(美)의 기준은 '똑같지 않음'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이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미학일지라도 모르겠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균일하고, 오차 없이 반듯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세상의 기준? 과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나만의 스타일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방향이 옳다고 느낀다.


완벽하게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원단보다, 손으로 한 땀씩 수놓아 약간씩 다른 간격을 가진 자수가 더 오래 눈길을 붙잡고. 기계로 재단한 직선보다, 손으로 오려낸 조금 삐뚤빼뚤한 곡선이 더 오래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핸드메이드의 감성'이라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람의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불규칙함 속에 숨은 사람의 숨결 기계가 뽑아낸 직선은 매끈하고 완벽 하지만 거기엔 떨림도 없고, 망설임도 없으며, 그날의 감성도 없기에

내가 고집하는 손바느질의 묘미는 바로 그 '불규칙한 손맛'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바늘땀의 간격, 원단의 결을 따라 미세하게 어긋나는 선들, 손끝의 온도가 스며든 실의 긴장감. 나는 그 틈새에서 비로소 사람의 온기를 느끼곤 한다.


어느 날은 손이 유독 떨렸던 날이 있었다. 걱정이 많았던 날이었다. 그날 완성한 퀼트 한 조각을 나중에 다시 펼쳐보니, 바늘땀이 유독 작고 촘촘했다. 마치 그 불안을 꾹꾹 눌러 담듯이. 누가 보면 그냥 '조금 불규칙한 바느질'이겠지만, 나는 그 안에서 그날의 나 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기계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알고리즘은 데이터를 학습하지만, 그날 아침 내가 마신 커피의 온도와, 창밖으로 보이던 흐린 하늘과, 마음 한구석의 작은 두려움을 바늘 끝에 담는 방법은 학습할 수 없으니까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편안함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빈티지한 아름다움이자, 가장 인간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겹겹이 쌓인 시간이라는 서사.



느린 것이 사치가 되는 시대에 세상이 빨라질수록 나는 역설적으로 더 느려지기로 했다.

이것은 선언이라기보다 생존의 방식에 가깝다고나 할까? 빠름과 효율로 이미 가득 찬 세상에서, 내가 굳이 같은 속도로 달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 레이스에서 손바느질은 이길 수 없으니까

효율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비효율적인 작업. 몇 시간을 들여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을 완성하고, 그 조각들을 수십 개 이어 붙여 하나의 퀼트를 만드는 일.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치'이자 위로가 될 거라 믿는다.

멈추는 것, 느려지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이

단순한 행위들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되길 바라며


시대에 창작자로서의 고유성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나는 이제 다르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내가 온전히 그 순간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는 것. 그것이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삐뚤빼뚤할수록 더 진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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