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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11. 2019

#223 결심 따위를 하느니, 그냥 일부터 하고

고시를 준비하든 20대 때의 일이다. 나는 꽤 자주 산에 가곤 했다. 운동삼아, 기분 전환 삼아 간 적도 많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떤 결의를 다지기 위한 의식 차원의 산행. 산에 올라가면서 나는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야지’ 라거나 ‘스타크래프트를 끊어야지’ 같은 결심을 했다. 게다가 등산로 주변에는 늘 기도처로 소문난 영험한 바위라든가, 겉보기에도 퍽 신령스러운 수백 년된 산신각 같은 것이 있었다. 경건하게 나 자신을 다잡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장소들이었다.  


그렇게 오른 산은 늘 좋았다. 정상에서의 감흥도, 바위나 산신각에서의 경건함도 좋았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익숙한 게으름’과 결별하며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은 일종의 종교적 감정과도 가까웠다. 비교종교학자 M.엘리아데는 <성과 속>에서 말하길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했다.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죄가 씻기고 영혼은 ‘새롭게’ 태어난다. 시간적인 ‘태초’다. 이슬람 교인은 시간이 되면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한다. 공간적인 ‘중심’이다. 종교적인 행동이란 우주의 중심을 찾아 태초를 맞이하는 일이다. 산은 우주의 중심이었고, 정상에서 태초를 맞이하였으므로 그곳에 오른 나는 어제와 다른 존재였다. 스타크래프트 없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어야 했다.  


문제는 그런 경건한 마음이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시냇물 속에 풀어놓은 잉크처럼 순식간에 흐트러졌다는 사실이다. 등산을 마치면 항상 배가 고팠다. 산 입구에는 막국수를 파는 집이 드물지 않아 즐겁게 끼니를 때웠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 노곤함이 밀려왔다. 장마철에 막아 놓았던 댐의 수문이 활짝 열리듯이 말이다.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고 이불 위에 몸을 던지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는 전신 마취를 하듯 잠으로 빠졌다. 그렇게 한잠을 달게 자고 일어나면, 우주의 중심이나 태초의 시간 같은 것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다시 원래의 내가 여기 있었다. 책을 펴기 싫어하는 나, 도서관을 가기 싫어하는 나.  


리셋 증후군(Reset syndrome)이란 것이 있다. 컴퓨터의 리셋 버튼을 누르듯이 현실에서의 삶도 다시 리셋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증상이다. 원래의 용어에서는 살인을 저질러 놓고도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심각한 정신병적 착각을 의미한다. 나의 경우는 물론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지만, ‘내일부터 새로운 내가 되어 열심히 해야지’ 같은 결심이 반복되자 아주 가벼운 수준의 리셋 증후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따금 산에 갔고, 결의를 다졌고, 막국수를 먹은 후에, 블라인드를 치고 잤다. 엉망인 시절이었다. 

나는 그 엉망의 패턴이 산에 걸쳐 있었지만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교회에, 절에, 성당에, 혹은 일기장 위나 훌쩍 떠나는 여행, 심지어 술집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술꾼들은 술을 마시면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기도 한다니까. 결심하고, 흐트러지고, 다시 결심하기를 반복한다면 누구나 이 패턴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이미 이런 패턴이 몸에 밴 사람은 ‘단단한 결심’ 따위는 소용이 없다. 결심 자체가 엉망인 패턴의 일부인 까닭이다. 장기적으로 시세가 하락하는 주식 장에서 일시적으로 고개를 쳐드는 그래프에 불과하다.  


"결심 따위를 하느니, 그냥 그날 할 일을 하는게 낫다.”  


이 사실을 깨닫는데 나는 10년이 더 걸렸다. 전업 수험생으로 살았던 20대의 문을 닫고, 직장에서 밥벌이를 하며 앞길을 모색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알게된 요령이다. 아무리 피곤하고 일하기가 싫어도, 근로계약서가 살아 있는 한 출근을 해야했다. 일단 출근을 하면 머릿속은 배터리가 다된 듯이 오락가락한 날도 겉으로는 내식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예의였고 사회 생활이었으며, 나는 이미 어른이었다. 그런 와중에 글쓰기든 팟캐스트든 벌여놓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니, 늘 시간이 없었다. ‘잘 해야지’ 라고 결심할 시간에 그냥 해야 했고, ‘잘 하는 것’ 이전에 일단 하는 것이 급했다. 나는 늘 산에 가고 싶었으나, 그래서 태초의 중심에 서서 맑은 정신이 되고 싶었으나, 주말까지 기다릴 여유는 늘 없었다. 결심하지 않고 일부터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얻은 결과물들이 나쁘지 않았다. 양에서든 질에서든 말이다. 시세를 보여주는 그래프는 확실히 상승세였다. 게다가 더 좋았던 사실은 이것이다. 결심과 흐트러짐의 패턴이 슬그머니 흐려지면서 엉덩이가 조금 가벼워졌다. 생각하기 전에 이미 몸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날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런 날들이 늘어날수록 기분도 괜챃아졌다. ‘나란 놈이 쓸 만한 녀석이군.’  


뇌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춤추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그냥 춤을 춰야 한다. 그래야 춤추는 뇌회로에 신호가 흐르며 머릿속의 경로가 뚜렷해진다. 춤을 추겠다는 결심은 춤이 아니다. 등산을 하며 춤을 추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때는 등산 회로에 신호가 흐를 것이고 그로 인해 등산 뇌회로가 강화된다. 정상의 개운함과 산신각의 경건함과 막국수의 시원함이 점점 더 생각났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요즘도 아주 가끔 작업 속도에 구름이 끼는 즈음이면 느닷없이 등산을 가고 싶다. “산에 가서 다시 한번 결의를!”이란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을 보니 아직 '태초의 중심' 회로가 머리 구석 어딘가에 살아있나보다. 다행히 이제 나는 조금 더 노련하게 태초의 중심을 찾을 수 있다. 일이 하고 싶지 않을 때 작업을 시작하고, 책을 펴기 싫을 때 공부에 들어가야 한다. 엉망이어도 좋으니까 조금이라도 일하고 조금이라도 공부하는 것이 먼저다. 등산은 그 다음. 가장 강한 결심은 사후 보고다.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이미 이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진짜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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