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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엄마 넷, 아빠 하나가 떠난 여행에서 일어난 일들

1.

유부녀 넷과 유부남 하나가 한 공간에 오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연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아내와 동네 아줌마 셋이 의기투합을 했다. 일요일에 아이들을 경기도 외곽에 있는 ‘자연학교’라는 곳에 보내자고 합의를 본 게다. 어른 넷과 아이 여섯을 태울 차는 해결했지만 문제는 그곳까지 운전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을 접할 기회가 없다는 안타까움 반, 반 백수 글쟁이 남편으로서의 미안함 반으로 일일 운전수를 하기로 했다.


 ‘작가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글쟁이로서 지론이라면 지론이다. 이해하고 싶었다. 공감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내가 운전을 하는 동안, 뒤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주제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어는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정기적으로 아이 지능을 검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 또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국제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쉴 틈 없이 각자의 교육관에 대해 늘어놓았다.


 아무 말 없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불편함을 넘어 짜증스러움이 몰려왔다. 그 엄마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서로 돕고, 서로를 껴안으며 살아가는 ‘인간’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일단 옆에 있는 것들을 해치울 수밖에 없어’라는 ‘짐승’을 키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요즘 세상이 짐승들이 난무하는 정글 아니던가. 그러니 자식 가진 부모 입장에서 먹히는 쪽 보다 먹는 쪽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무작정 나무랄 수만도 없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니까.


 하지만 내 인내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 중 한 엄마가 유치원 선생 욕을 시작했다. 내용인즉슨, 아이가 영어유치원을 다니는데, 그곳에서는 한국어를 말할 수 없단다. 무조건 영어로 말해야하는 것이 그 유치원 규칙이란다. 문제는 아이가 배가 아픈데 그걸 영어로 말할 수 없어 동동 구르고 만 있었던 거였다. 선생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냐며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단다. 그 사실에 그 엄마는 화가 난 거였다.

 

 영어를 못해 배가 아프다는 이야기조차 못하는 아이의 마음이 느껴져 순간 울컥했다. 어렸을 때, 구구단을 못 외운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빈 교실에서 혼자 구구단을 외울 때의 그 서러움, 두려움, 외로움이 생각나서였을까? 그 울컥함은 이내 분노로 이어졌다. 참다못해 그 엄마에게 한 마디를 했다. “아이를 영어 유치원을 안보내면 되는 거잖아요” 순간 분위기가 싸 해졌지만, 이내 엄마 넷은 분위기를 대충 수습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2.

하지만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다다르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들과 유독 친하게 지내는 아이의 엄마 때문이었다. 그 엄마는 아이를 위해 말레이시아로 유학을 간단다. 남편은 한국에 있고, 엄마와 아이만 말레이시아로 간다고 했다.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한국에서 영어유치원을 보내서 아파도 말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나 외국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러나 매한가지 아닌가? 그 아이와 아들은 네 살 때부터 유독한 친한 친구였기에, 그 때부터 그 아이를 유심히 봐왔었다.


 아이의 아빠와도 엄마와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나눴다. 두 사람은 비교적 많은 나이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얻었다. 그래서 둘 다 아이라면 끔찍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주의다. 그래서 결코 쉽지 않았을, 아이의 유학 역시 결단을 내린 것일 테다. 나는 ‘왜 굳이 유학을 떠나려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돌린 답은 ‘한국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 아이는 내향적이기 하지만 큰 문제가 없는 아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그렇지 않았나보다.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말이 조금 늦으면 과도하게 불안해하고 그래서 온갖 검사에 학원을 보냈다. 그저 내향적인 아이일 뿐인데, 아이들과 조금 만 어울려 놀지 못하면 또 사회성 부족을 이야기하며 사회성을 길러준다는 갖은 학원과 모임을 찾아 헤맸던 것으로 안다. 엄마는 그 끝에 내린 결론이 ‘한국은 안 된다’였던 셈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자신은 아이는 한국에서 잘 자라날 아이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이보다 더 아이에게 불행한 일은 없다.


 아이의 내면은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가에 크게 좌우 되게 마련이다. 그 아이의 내면은 조금씩 ‘나는 스스로 알아서 삶을 헤쳐 나갈 수 없는 아이구나’라는 부정적 자기 인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엄마가 아이를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어렴풋이 알겠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닥쳐올 여러 가지 삶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해결해나가며 사는 건강한 어른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 아이가 안타까웠고, 또 그 엄마의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그릇된 모성애가 원망스러웠다. 그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이 복받쳤을 때, 나는 그녀에게 화를 내듯 말해버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계세요?” 그녀는 당황한 듯 화가 난 듯 “'짓'은 아니죠. 행동이지!”라고 답변하며 되받아쳤다. 더 다그치고 싶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의 조언은 폭력이란 걸 알기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아이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한다’는 말은 ‘믿어준다’는 말과 동의어다. 사랑이 힘든 이유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주기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을 하면 알게 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 믿음이란 걸. 의처증(혹은 의부증)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소유욕일 뿐이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믿어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3.

그녀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그녀는 모성이라는 본능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모성이라는 본능은 종종 소유욕으로 변질되곤 한다. 아이가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그 아이 자체의 존재를 인정해서라기보다 그 아이가 내 것이기에 잘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변질된 모성애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불행한 삶을 피할 수 없었는지는 주위 사람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한번이라도 털어놓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소유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느냐고? 많은 엄마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 엄마에게 언젠가 물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힘들 게 아이를 가지려고 하셨어요? 그냥 두 분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그 엄마는 이리 답했다. “아이가 없으면, 왠지 부부 사이가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그 엄마에게 아이는 일정 정도 바스라질 것 같은 부부 관계의 일종의 접착제였던 셈이다. 애정이 식은 부부에게 아이만큼 강력한 접착제도 없다는 걸, 부모라면 다 안다.     

 그 엄마는 사랑받고 싶었던 게다. 비록 애정이 식은 남편이지만 그에게라도 사랑받지 못한다면, 견딜 수 없다는 걸 직감했기에 그리도 애를 쓰며 아이를 가진 것일 게다. 한국의 많은 엄마들이 느끼는 이 애정결핍은 아이를 가짐과 동시에 기묘하게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받아야 할 사랑을 자신의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기에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인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편을 두고, 아이와 둘이서 유학을 떠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를 사랑해서 아이의 미래를 위해 둘만 유학을 떠난다는 말이 사실일까? 혹시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떠나는 건 아닐까? 이건 사랑이 식은 부부의 서로에 대한 모종의 기만일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사랑받고 싶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는 것으로 좋고, 남편은 돈만 보내주면 애정이 식은 아내와 떨어져 있을 수 있어도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아플 정도로 정직해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모를 일이다.


 나는 그 아이가 유학길에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어 좀 못하면 어떤가? 사교성이 조금 떨어지면 어떤가? 다른 아이들 보다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주위에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정서적으로 튼튼 자존감을 가진 아이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 어른들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면, 그건 내 아이가 강력한 포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일 테다. 나는 그렇게 내 아들과 그 아이가 함께 뛰어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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