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왜 이루기 어려운가?
누구에게나 지금 삶과는 다른, 바라는 삶의 모습이 있죠. 흔히 그것을 꿈이라고 하잖아요. 프로 복서, 소설가, 영화감독일 수도 있고, 혹은 좋은 엄마(아빠), 경제적 안정 같은 것일 수도 있죠. ‘거창하냐? 소박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꿈은 있죠. 누구나 꿈을 이루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이는 쉽지 않죠. 왜 꿈의 실현은 어렵고 드문 일인 걸까요?
잠재적 상이 실현되는 과정은 이 상이 몸으로부터 유용한 행동 방식들을 얻는데 이르는 일련의 단계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이 말한 “잠재적 상”이 바로 꿈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꿈이 있다는 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뿐, 잠재적인 형태로 그 자신 속에 있다는 말이잖아요. ‘소설가(좋은 엄마)’를 꿈꿀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적 상’의 형태로 존재하잖아요.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은 이 잠재적 “상이 몸으로부터 유용한 행동 방식들을 얻는데 이르는 일련의 단계들”과 같은 거죠. 즉, 마음속에 있는 ‘소설가(좋은 엄마)’라는 상이 실현되는 과정은 그 잠재적 “상이 몸으로부터 유용한 행동 방식을 얻는 일련의 단계”들과 같은 거란 의미죠.
어떻게 실제로 소설가(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세계와 타자를 더 섬세하게 파악하고(아이를 더 섬세하게 살피고), 이를 글로써 잘 표현할 수 있어야(아이를 잘 보살필 수 있어야)겠죠. 이는 단번에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소설가로서 행동 방식을 얻게 되는 일련의 단계(섬세한 감수성, 글을 다루는 능력)들이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단계들이 ‘잠재적 상(꿈)’이 실현되는 과정인 거죠.
바로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꿈을 쉬이 이루지 못하는 이유죠.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잠재적 상’(소설가)이 있지만, 아무나 그 ‘잠재적 상’의 실현을 위한 “유용한 행동 방식을 얻는 일련의 단계들”을 하나씩 밟아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해, 투박한 감수성에서 섬세한 감수성으로, 또 조악한 필력에서 유려한 필력으로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가는 이들은 매우 드물잖아요.
‘꿈’이 이뤄지는 과정은 ‘몸’이 이뤄지는 과정이다.
꿈(잠재적 상)의 실현에서 정작 중요한 건, “유용한 행동 방식을 얻는 일련의 단계들”인 셈이죠. 그러니 그 단계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잠재적 상은 잠재적 감각으로 발전하고 잠재적 감각은 실제적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운동은 실현되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연장될 감각과 그 감각과 한 몸이 되기를 원했던 상을 동시에 실현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잠재적 상(꿈)”의 실현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어요. ‘잠재적 상→ 잠재적 감각→ 실제적 운동→ 잠재적 상의 자연적 연장 → 실현’ 소설가를 꿈꾸는 직장인 B가 있어요. 당연히 B는 어떤 잠재적 형태의 소설가(잠재적 상)를 마음에 품고 있겠죠. 이 ‘잠재적 상’은 글 쓰고 싶다는 ‘잠재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리고 그 ‘잠재적 감각’은 실제로 글을 씀으로써 ‘실제적 운동’으로 전환될 겁니다.
이 과정(잠재적 상→잠재적 감각→실제적 운동)은 B에게 어떤 변화를 촉발할까요? ‘잠재적 상’(마음속의 소설가)이 조금씩 ‘현실적 상’(실제 소설가)으로 바뀌어 갈 겁니다. 이것이 ‘자연적 연장’이에요. 쉽게 말해, B에게 세계와 타자를 보는 섬세한 감수성(감각)과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감각이 조금씩 더 펼쳐지게(연장) 되는 거죠. 즉, 직장의 일을 하는 몸과 마음의 근육(감각)에서 점차 글을 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근육(감각)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이죠.
그 바뀜이 (‘창조’가 아닌) ‘연장’, 즉 펼쳐짐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속에 이미 잠재적 형태(상)로 존재했기 때문이에요. 잠재적 소설가는 원래 B 속에 있었고, 이것이 실재적 소설가로서 “유용한 행동 방식을 얻는 일련의 단계들”을 거침으로서 조금씩 ‘연장’된 것이죠. 그 ‘연장(펼쳐짐)’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 ‘잠재적 상’(꿈꿔오던 소설가의 모습)은 온전히 ‘실재적 상(등단한 소설가)’으로 ‘실현’되는 것이죠.
‘꿈’을 이룬다는 것은 ‘몸’이 이뤄지는 과정인 거예요. 이는 비유하자면, 100개의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배의 부속품을 하나씩 바꿔서 결국 완전히 다른 배가 되는 상황과 같아요. 원래 ‘배’(직장인)에서 부속품을 하나씩 바꿔서(연장해서) 100개를 다 바꾸게 되면, ‘배’라는 형식은 같지만 전혀 다른 ‘배’(소설가·복서)가 되잖아요. 실제로도 그렇잖아요. 똑같은 사람이지만, ‘직장인’이었을 때는 배 나오고 계단만 올라도 숨을 헐떡이는 몸이었지만, 꿈을 이뤄 ‘복서’가 되면 근육질에 계단 정도는 노래를 부르며 오를 수 있는 몸이 되잖아요. 이것이 ‘잠재적 상’(꿈)이 실현되는 양상이에요.
‘잠재적 상’의 실현, 진화
이는 생물학적 진화evolution에도 그대로 적용되죠. 사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일종의 ‘진화’잖아요. ‘직장인’에서 ‘소설가(복서·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이 바뀐다거나 역할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 자체가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진화’하는 거잖아요. 생명의 ‘진화’ 역시 ‘잠재적 상’이 “유용한 행동 방식을 얻는 일련의 단계들”을 거치며 ‘현실적 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에요.
네 발로 기어다니는 한 생명체가 직립보행을 하게 되는 ‘진화’의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이 생명체가 ‘진화’하려면 가장 먼저, ‘잠재적 상’, 즉 걸어 다니는 자신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해요.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진화에는 우발성의 몫이 크다”고 말해요.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할 때 우발적 요소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예컨대, 육지 생활을 하던 생명체가 우연히 호수나 바다와 마주치지 못했다면, 헤엄치는 생명체로 ‘진화’는 애초에 불가능하잖아요. 하지만 동시에 베르그손은 그 ‘진화’가 전적으로 우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요.
진화를 결정하는 우연적 요소들이 미소변이들이라면, 이 변이들을 보존하고 축적하기 위해 어떤 선한 신bon génie - 미래의 종種이라는 신-에 호소해야 한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선한 신, 잠재적 상
‘진화’를 결정하는 데는 분명 우연적 요소들이 있죠. 하지만 그 우연적 요소들이 촉발하는 변이는 미소변이, 즉 아주 작은 차이들일 뿐이죠. 그 작은 차이들이 질적인 변화(진화)를 일으킬 만큼 커지려면 그것을 잘 “보존하고 축적”해야겠죠. 그 보존과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게 “어떤 선한 신”이에요. 이 ‘선한 신’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종이라는 신” 즉, ‘잠재적인 상’인 거죠.
네발로 기는 생명체는 우연히 주어지는 환경에 적응하며 이런저런 영양분을 섭취하겠죠. 이 우연적 요소들은 분명 직립보행이라는 ‘진화’를 위해 필요한 작은 차이(미소변이)들을 촉발하겠죠. 그런데 이 작은 이 차이가 보존되고 축적되어 두 발로 걷게 되는 실재적인 ‘진화’를 하려면, 그 생명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잠재적 상’(미래의 종이라는 신)에 끊임없이 호소해야만 하는 거죠.
꿈(잠재적 상)의 실현 과정을 이 생명체의 관점으로 다시 설명해 봅시다. ‘잠재적 상’(두 발로 걷는 존재)은 가장 먼저 ‘잠재적 감각’을 촉발되겠죠. 즉 그 생명체에게 네발로 기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걷고 싶은 감각이 촉발되겠죠. 그렇게 그 생명체는 우연히 주어지는 여러 요소(공간·기후·영양분…) 속에서 앞발을 들고 움직이는 행동(운동)을 하게 될 테고, 이를 통해 ‘잠재적 감각’이 ‘실제적 감각’으로 전환되겠죠. 그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 그 생명체의 몸은 조금씩 ‘자연적 연장’을 이룰 겁니다. 앞발은 점점 퇴화(혹은 변형)하고, 척추는 점점 수직화되고, 뒤발은 점점 더 활성화되겠죠. 그렇게 아주 긴 시간이 흐르면 그 생명체는 직립보행을 ‘실현’(진화!)하게 되는 거죠.
‘이상의 궁전Palais Idéal’
이는 마음속에 담아둔 설계도(잠재적 상)를 따라 건물을 짓는 건축가와의 모습과 유사할 겁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오뜨리브에는 ‘이상의 궁전Palais Idéal’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있어요. 이는 기묘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예술적 건축물로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어요. 놀랍게도, ‘이상의 궁전’은 우편배달부인 ‘페르디낭 슈발’이 3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물이에요. 우편을 배달하며 우연히 얻게 된 돌멩이들로 그 건물을 지었어요.
그 우발성(돌멩이)은 어떻게 예술적인 건축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슈발의 마음속에 ‘잠재적 상(궁전)’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연히 돌멩이를 하나씩 얻게 될 때마다 그 ‘선한 신’(잠재적인 궁전)에게 호소했던 셈이죠. 즉, 마음속에 설계도를 늘 떠올렸기 우연히 얻은 돌멩이로도 예술적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거죠. 슈발은 ‘이상의 궁전’은 자신이 어느 날 꾼 ‘꿈’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밝힌 바 있어요. 자신이 어느 날 밤에 꾼 ‘꿈’이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잠재적 상)이 된 셈이죠. 그 ‘잠재적 상’이 앞서 말한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이상의 궁전’이라는 ‘현실적 상’으로 ‘실현’된 거죠.
잠재적 상, 막대한 잠재성
이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진화’, 즉 꿈의 실현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꿈(잠재적 상)의 실현에서 가장 첫 단계는 당연히 ‘잠재적 상’이죠. 이 당연한 부분이 가장 중요해요. 꿈의 실현은 이 ‘잠재적 상’으로부터만 출발할 수 있으니까요.
생명은 물질의 접촉에서 충동이나 약동에 비교되지만, 그 자체로 고찰되었을 때는 막대한 잠재성이며 수천 가지 경향들의 상호침투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생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질의 접촉에서 촉발되는 충동이나 약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뭍으로 잡혀 온 물고기는 펄떡거리며 다시 물 속으로 돌아가려고 하겠죠. 이는 물고기가 물이 아닌 대기(물질)와의 접촉에서 촉발되는 충동이나 약동 그 자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물질과의 접촉을 제외하고, 생명(물고기)을 그 자체로 고찰하면, 그것은 “막대한 잠재성이며, 수천 가지 경향들의 상호침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물고기는 그 자체를 보면, 막대한 잠재성을 갖고 있죠. 자유롭게 헤엄을 칠 수도 있고, 새끼를 낳을 수도 있고, 무리 생활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육지와 바다를 오갈 수 있는 어떤 생명체로 진화해 나갈 수도 있는 존재잖아요. 이는 그 물고기 안에 이미 수천 가지 경향들이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잠재적 상’이라는 것은 바로 이 ‘막대한 잠재성’을 의미하는 거죠.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거죠. 한낱 미물인 물고기마저 막대한 잠재성을 갖는데, 하물며 인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죠. 즉, 우리 속에는 어떤 존재로도 ‘진화’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이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우리가 어떤 ‘잠재적 상’을 갖던 우리 안에는 그 ‘잠재적 상’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허망하죠. 실제 현실에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가 시인이라는 꿈(잠재적 상)을 품게 되었다고 해서,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 알잖아요. 이는 그 일용직 노동자에게 ‘막대한 잠재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실제적인 ‘진화’는 현재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죠.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종의 변형은 언제나 그것들의 특별한 이익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종의 변형”, 즉 ‘진화’는 무한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어요. 모든 생명은 ‘막대한 잠재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죠. ‘진화’는 언제나 “특별한 이익에 의해 진행”되게 마련이죠. 모든 물고기는 바다와 육지를 오갈 수 있는 생명으로 ‘진화’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현실적 그렇게 ‘진화’하는 물고기는 아주 소수일 겁니다. 이는 육지 생활에서 특별한 이익을 발견할 수 있는 물고기가 소수이기 때문이죠. 육지에서 특별한 이익을 발견한 어류만이 양서류로 ‘진화’하게 되는 거죠.
‘뜬구름 잡는 꿈’은 없다.
우리의 ‘진화’ 역시 마찬가지죠. 모든 직장인은 복서, 소설가, 영화감독 등등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죠. 하지만 그들 중 실제로 그 ‘잠재적 상’을 ‘실현’하는 이들은 드물죠. 왜냐하면, 복서, 소설가, 영화감독 생활에서 특별한 이익을 발견하는 이들이 적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잠재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주어진 이익(기쁨)을 통과해야만 해요. 그 과정을 통해 ‘잠재적 상’이 ‘현실적 상’으로 실현(진화)돼요.
일용직 노동자는 어떻게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가 아무리 시인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해도, 먼저 최소한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겁니다. 어류(바다 생활)는 어떻게 양서류(육지 생활)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물고기가 아무리 육지 생활을 소망한다고 해도, 먼저 최소한 호흡 문제(아가미→폐)를 해결해야 했을 겁니다. 그 현실적으로 주어진 이익(기쁨)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다음의 특별한 이익(시를 쓰는 기쁨, 땅위를 걷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뜬구름 잡는 꿈’은, 이룰 가능성이 없는 꿈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주어진 이익(기쁨)을 통과하지 못한 꿈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호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육지 생활을 하고 싶다는 물고기의 꿈은 ‘뜬구름 잡는 꿈’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 역시 ‘뜬구름 잡는 꿈’일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이는 당장 현실적으로 주어진 이익(기쁨)들을 회피하지 않고 하나씩 통과할 때만 가능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