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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밀 Apr 29. 2024

임신 19주 차의 일기

쑥쑥 자라는 뱃속의 아기











꿈에서 눈이 돌아있는 사이비 아줌마가 집까지 쫓아 들어오면서, 내가 자판기에서 맥주 한 캔을 사 마시는 걸 봤으니 정부에 고발하겠다며 난리를 쳤다. 소중한 아기가 기형아로 나오면 어쩌려고 임산부가 감히 맥주를 마셔? 하며 노발대발 화를 내기에 나는 그런 적이 없으니 어디 고발할 테면 해보라고 맞받아치면서도 꼭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 같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존재 목적은 오로지 건강한 아기를 생산하는 데에 있다고 보는 길리어드. 기형아를 출산하거나 임신 가능 연령이 지나면 콜로니라는 유배지로 쫓겨나는 곳. 지난 주말에 갔던 솥뚜껑 김치 삼겹살 집에서 잠시 소맥 생각이 간절하긴 했지만 벌써 몇 달째 금주 중인데! 내가 맥주를, 그것도 편의점이나 마트가 아닌 자판기에서 사다 마셨다니 무슨 소리야! 당신은 대체 뭘 본 거야! 어찌나 억울했는지 잠꼬대까지 하며 끙끙대다 남편이 깨워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길리어드 아닌 한국이라 참 다행이야. 한국이 아기를 키우기에 특별히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곳보다는 확실히 나으니까. 『시녀 이야기』 시리즈를 읽은 지 한참 됐는데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꿨을까 생각해 보니 역시 솥뚜껑 김치 삼겹살 집에서 떠올린 소맥 한 잔이 내 죄책감이랄까 욕망을 자극했던 것 같다.


아기 낳고 난 뒤에는 육퇴 후에 남편과 나란히 앉아 짠, 하고 나누는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그런 날이 언제쯤 오려나. 아직은 너무나 까마득해 보이기만 하는 미래.












임신한 다음부터 손가락을 꼬물거릴 수 있는 태교의 일환으로 뜨개질에 입문했다. 원래는 차차에게 양말이나 옷을 떠줄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쌓아보겠다는 야심으로 집 주변 공방을 찾아 클래스를 듣기 시작했는데, 도안 보는 법도 모르는 왕초보다 보니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기본 스텝부터 밟아 나한테 맞는 사이즈의 탑다운 노프릴 풀오버 스웨터부터 뜨게 됐다. 약 5회 차 수업과 과제 수행을 진행하면서 한쪽 팔만 남겨둔 상태로 (실이 다 떨어져서) 일단 중단하고, 지금은 내 여름용 반팔 바텀업 스웨터에 발을 들였다. 스웨터 두 개로 어느 정도 감이 생긴 다음에는 작아서 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그래도 다행히 작업 시간은 좀 더 짧게 들어가는─ 차차 옷도 뜰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세 개의 작품을 완성하면 딱 출산 예정일 즈음이 될 것 같다.


요즘 여러 니터들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며 아기용 옷을 구경하는 중이다. 아무리 품질 좋은 실을 사용한다고 해도 막 태어나자마자 간질간질할 수도 있는 뜨개 옷을 입힐 수는 없으니 5, 6개월 정도 되는 아기가 입을 수 있는 옷으로 골라야겠어.



뜨개질하는 중간에 잠깐씩 배를 쓰다듬으며 차차야, 너도 예쁜 옷 떠줄게, 하는 순간들도 소소한 행복 중 하나가 되었다. 아기 하나가 찾아왔을 뿐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행복은 서른마흔다섯 개.













다음 주면 진료네, 이번 주는 진료네, 하다 보니 정말 19주 차 진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2차 기형아 검사까지 마쳤으니 이제 뭘 할까. 그냥 차차가 잘 있는지 보러 가는 것도 좋은데.





먼저 입덧약. 지난 16주 차 진료에서 하루 두 알 먹을 수 있도록 처방해 주셨는데, 나는 정말 힘들 때가 아니면 딱 한 알씩 먹어서 아직 몇 알이 더 남은 상태. 추가 약을 더 안 받아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비상약으로라도 받는 게 괜찮으려나 싶다가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게 내가 입덧약에 의존하고 있다는 방증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해서 조금 망설여진다.




다음은 하루가 다르게 시나브로 부푸는 배. 식당에 가니 아주머니들이 알아보고 먼저 말씀을 건네주신다. 입덧 심하던 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배가 꽤 나왔다, 하며 반가워하시니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같이 털어놓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웃긴 에피소드 하나. 나는 1개월은 곧 4-5주 정도라고 생각했고, 임신은 보통 주 수로 많이 기록하거나 말하는 만큼 누군가에게 내가 임신한 지 얼마나 됐는지 말해야 할 때는 '16주 됐다'는 식으로 설명해 왔다. 상대가 16주면 몇 개월이지, 할 때는 대충 4개월 정도 됐다고 말하는 식. 그래서 배가 많이 나온 걸 보고 시어머님이 한 5개월 됐냐며 놀라실 때 굳이 아직 5개월은 안 됐고 17주 조금 넘었다며 정정해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렇게 계산하는 게 아니더라고.


0주 0일부터 3주 6일까지는 1개월 / 4주 0일부터 7주 6일까지는 2개월 / 8주 0일부터 11주 6일까지는 3개월 / 12주 0일부터 15주 6일까지는 4개월 / 16주 0일부터 19주 6일까지는 5개월 / 20주 0일부터 23주 6일까지는 6개월 / 24주 0일부터 27주 6일까지는 7개월 / 28주 0일부터 31주 6일까지는 8개월 / 32주 0일부터 35주 6일까지는 9개월 / 36주 0일부터 39주 6일까지는 10개월(40주 0일은 출산예정일), 이라고 보기 때문에 5개월 됐냐는 어머님 말씀이 맞는 거였다!


그래도 아직 이렇게 ○개월 계산법은 너무 생소하고 어렵기 때문에, 개월 수로 말해야 할 때는 메모해 놓은 걸 살짝 들춰보고 대답하는 편. 숫자에 약한 나로선 이 계산법에 적응할 때쯤 출산예정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주 차 진료를 받으러 운정와이즈병원에 갔다. 남편은 주차하느라 내가 먼저 올라와서 혈압과 체중을 재고 (혈압은 정상, 체중은 임신 전에 찍은 최고 몸무게보다 1kg가 더 늘어 있었다!) 진료실 앞에서 대기. 잠시 후 이름이 불려 들어갔더니 김혜미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분만 수술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셔서 길게 이야기하진 않고 바로 초음파를 보러 들어갔다. 눕고, 배를 활짝 드러내고, 어느새 도착한 남편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봤다.








머리 크기부터 재기. 19주에 맞게 잘 발달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핏 얼핏 보이는 차차의 옆모습. 딱 봐도 엄청 자랐다! 언제 이렇게 컸어, 우리 아기.














나는 오똑 솟은 차차의 코부터 보였는데 남편은 척추가 먼저 보였다고. 얼굴 윤곽이 조금씩 생기는 게 너무 귀여워서 보는 내내 나도 남편도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지?













쿵쾅쿵쾅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실제로는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작을 심장인데도 세차게 뛰며 내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조금 찡한 기분이 되었다, 라고 쓰려했지만 사실은 들을 때마다 찡하다.







초음파를 다 보고 나와서 선생님과 최근의 몸 상태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입덧약을 하루에 한 알씩으로 줄였는데도 괜찮다고 했더니 그럼 처방을 더 안 해보는 쪽으로 하자고. 약간 불안했지만 아직 4알 정도 남아있기도 해서 그러겠다고 말씀드렸다.




차차를 보고 나오면서 잠시 본가에 들렀다. 웨딩 앨범이 나왔기 때문에 양가에 한 권씩 가져다 드릴 생각이었는데, 아빠는 앨범보다 차차의 초음파 영상을 더 오래오래 집중해서 봤다.










이제 다음 진료는 또 3주 뒤. 입덧약 없이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도 되지만, 3주 뒤에 보면 우리 아기가 얼마나 커져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이 조금 더 크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보기로 해, 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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