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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오 Jun 05. 2024

예비 자유인

#도비는자유예요


                                                                       

일 년에 5천만 원 모으기! 결혼 후 5년 안에 내 집 마련하기!

결혼하자마자 남편과 나의 월급으로 총예산을 잡고 1년에 5천만 원 모으기를 했다.

생활비, 공과금, 대출금 이자, 주유비, 예비 경조사비를 지출에 넣고 나니, 

우리 둘의 개인 용돈은 월 3만 원이었다. 가끔 좋은 날 이벤트로 치킨은 반마리면 충분했다.

 결혼 전에 옷이며 신발, 가방을 잔뜩 사대던 나는 무척 괴로웠다. 


신혼집 이사 첫날 라면 상자 두 박스를 짐으로 내려놓은 남편은 평소에 워낙 검소한지라 어느 달은 3만 원도 채 못써서 그다음 달로 잔액을 이월하기도 했었다. 둘 다 직업의 특성상 회식이 잦지도 않았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구들이 많아서 줄어든 모임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다달이 모은 돈과 생활 습관이 우리의 마중물이 되었다. 돈이 정말 신기한 게 이삼백만 원이 있을 땐 그저 그랬지만 990만 원이 되고 9,900만 원이 되면 자꾸 그다음 단위를 꿈꾸게 만들었다.  


첫 딸의 결혼식이 본인의 결혼식마냥 신나 했던 엄마는 소박한 예식장에 한번 울고 한복을 대여하라는 말에 두 번 울었다. 결국 엄마의 한복은 새것으로 맞춰드렸다. 

아이의 돌잔치도 양가 부모님만 모시고 집에서 셀프로 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우리가 다른데 낸 돈이 얼마냐며 씁쓸하게 웃으셨지만 이해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결혼 후 6년 동안 용돈 3만원 규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 

짠테크만으로 년 5천만 원 이상의 돈을 모았다.


그리고 결혼 후 5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6년 10월  3대가 덕을 쌓아야 당첨된다는 청약에 당첨되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내 집을 마련한 거다. 목표가 하나둘씩 이루어졌지만 당장의 기쁨에 안주하지 않았다. 

파이어족을 꿈꾸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고생하자는 명분으로 살고 있는 집에 전세금을 빼서 저축은행 여러 군데 분산하고 남편 회사 사택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간부들을 위해 지어져서인지 전셋집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다. 아파트가 완공되기까지는 무주택자 신분이라 운이 좋았다.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둔 3년 동안 종잣돈은 더 빠르게 늘어났다. 

대출금의 이자를 갚는 게 아닌 은행에서 이자를 받는 기분이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 

복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 와중에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고 계획대로 대단지 새 아파트 초품아에서 아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적극적 투자자가 되겠다며 5개월 만에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처음으로 적당한 가격의 와인을 사 와서 “자! 다음 목표는 2 주택이야~!” 하며 까르르 웃었다. 우리의 욕심은 산불처럼 번졌다. 어느 곳에 여행을 가도 풍경을 즐기지 못하고 임장 하듯이 땅과 건물을 살폈다. 

정말 말하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일어나는 줄만 알았다. 

얼마 후 건강 검진을 다녀온 남편은 대장내시경 조직을 큰 병원으로 가져가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보, 누구나 몸 구석구석에 혹 한두 개는 다 있다더라! 걱정 마”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혼자서 인터넷에 수없이 검색을 했다. 드디어 아산병원에서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왔고 남편은 대장암 1기였다. 다행히 1기라 전절제가 아닌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 동의서를 읽고 사인한 후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 로비를 걸어 나가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아무런 배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겨울이었는데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 쿨한 척 별거 아니라 했지만 좋아하던 맥주 한 잔 못하고 긴장하며 수술 날짜를 기다리던 남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때마침 동료 선생님 남편분이 같은 병원에서 디스크 수술을 목전에 두고 대기실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남편 몰래 장례식장에 다녀온 나의 불안함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앉아 방학을 향한 디데이 숫자와 지나간 날들에 커다란 X표시들이 빼곡한 책상 위 내 달력을 보았다. 늘 그래왔다. 어쩌다 방학 때 해외여행 계획이라도 생기면 365일 중 수많은 날들은 나에게 그저 그런 날들이 되고, 그 여행 날만 기다렸던 것이다. 

여행 마지막 날은 허무함과 다시 돌아갈 일반 날들에 대한 두려움과 짜증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정량화 된 목표는 만들지 않기로 했다. 물론 경주마처럼 달려왔던 시간들이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목표를 없애면 수많은 날들에 동그라미 표시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욕심이 사그라들었다. 욕심이 없어지고 나니 드디어 하늘이 보이고 꽃이 보였다. 

여유가 생기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돈이 많아서 자유롭게 쓰는 것이 아닌, 돈이 많던 적던 내가 가진 돈으로 만족하고 소비한다면 그게 진정한 돈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날 이후, 누가 나에게 버킷 리스트가 뭐예요? 인생의 목표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나는 “없어요”라고 대답해 왔다. 마치 인생을 다 산 100세 노인처럼 나는 진짜 없었다. 

대신 이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자유인을 꿈꾼다. 


행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아! 이제 누가 물으면 “없어요”가 아닌, “자유인이요”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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