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가 약을 늦게 먹어서 오늘 수업을 한 시간 뒤로 미뤘으면 해요]
‘또? 아이씨이’ 지하철 안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과외 수업 삼십 분 전에 한 시간 뒤로 미루자는 문자는 차라리 오늘 취소한다는 통보만 못하다.
솟구치는 짜증을 뒤로하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답장을 보냈다.
어디서 시간을 때우고 있어야 하나. 도곡역 근처는 커피값도 비싼데. 얼른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충무로역이다. 나는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 잽싸게 몸을 날렸다. 간신히 플랫폼에 두 발을 딛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같은 과 윤수다.
“너 수강 신청했어?”
“뭐? 오늘이야? 깜빡했네. 전자기학 2 들어야 하는데.”
“그건 벌써 1분 만에 마감했지. 너의 최애 황훈기 교수님 수업 듣겠다는 놈이 수강신청 날짜를 까먹냐. 2학년 애들은 그거 신청하려고 PC방에서 한 시간 전부터 대기 탔대.”
“아오! 완전 망했네. 난 졸업하기 전에 교수님 실물이라도 영접하는 게 소원이다.”
작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수강신청 창을 열었다.
역시 인기 있는 교수님 수업은 이미 마감이었다. 그나마 3, 4학년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이 있어서 이번 학기 수강 신청을 겨우 채울 수 있었다. 황 교수님은 강의도 재미있고 학점도 잘 주신다고 정평이 나있다.
최근에는 과학 예능 방송으로 유명세를 타더니 수강하려는 학생들이 더 많아졌다.
아무튼 학교 안팎으로 인기스타셨다. 다음 학기에는 정신 차리고 꼭 수강 신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인 도곡역에 내렸다.
코끝에 어디선가 날아온 고급진 꽃향기가 스쳤다. 고개를 길게 뒤로 젖혀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건물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옅은 한숨이 났다. 입구로 들어서자 내 또래의 시큐리티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익숙하게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맡기고 열어 준 출구를 통과했다.
황금빛을 뿜어내며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승강기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지하에서 올라온 승강기 안에는 두 명의 인부가 영롱한 비취색 대리석 테이블을 등으로 힘겹게 받치고 있었다. 나와 같이 탄 진주 목걸이를 칭칭 두른 아주머니가 세모눈으로 인상을 쓰며 코를 쥐어쌓다.
그때서야 꽃냄새가 시큼한 땀 냄새로 바뀌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손잡이 조명이 몇 번 바르르 떨더니 문이 열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입구 방으로 들어갔다. 퀭한 눈의 지호는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좀 잤니? 세수하고 와.”
앞머리가 흥건히 젖은 채 방으로 돌아온 지호는 마치 잡히자마자 얼어버린 초점 잃은 생선처럼 허공을 바라봤다. 팔꿈치로 팔을 툭 치니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게 좌우로 흔들었다.
책상 위에는 콘서*라고 쓰인 먹다 남은 알약 껍데기가 스탠드 불빛에 반짝였다.
지호를 알게 된 건 제대를 일주일 앞둔 11월이었다. 복학을 위해 학교에 갔다가 입대 군휴학을 앞둔 후배의 과외를 대신하기로 했다.
“선배! 충성!”
“충성은 무슨, 우리 부대는 단결이야!”
“단결! 선배, 수학 잘하시죠! 혹시 과외 하나 하실래요?”
백만 원이라는 과외비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제대 후엔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복무 중 받은 월급도 살뜰히 모아두었지만 월 백만 원이면 과외 하나만 하고 취업 준비를 해도 될 것 같았다. 학생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시범 과외를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수학 1 문제집을 사서 제대 날까지 틈틈이 공부했다.
시범 과외날 처음 방문한 지호의 집은 현관 입구에서부터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실내 전체에 암막 커튼이 쳐있는 것처럼 집안은 암흑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신발장 센서등 아래 서있는 지호 어머니는 가운데 가르마를 탄 단발머리로 머리카락으로 옆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숙인 고개 사이로 두 볼이 푹패이고 다크서클은 매우 짙었다.
인사를 하다 잠시 눈을 마주쳤는데 그 눈빛이 참으로 괴기해 등줄기에 한기가 들 정도였다.
“지난번 선생님이 수하까지 마무리해주셨으니 시범 수업은 1단원 지수와 로그 바로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수업을 해보니 지호는 머리가 꽤 좋았다. 처음 배우는 기호도 쉽게 이해하고 수식도 능숙하게 변형했다.
체격이 매우 왜소하고 몸에 힘이 없어 보였지만 공부에 찌든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절반은 지호처럼 좀비 같은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시범 수업 후 방문 앞에서 지호 어머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전반적으로 설명을 잘하시네요. 그런데 아까 지호가 3번 문제와 15번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오실 때 보충설명 부탁드려요. 계좌번호 문자로 주시고요”
“네? 아아 네에에. 알겠습니다.”
지호 방문 바로 앞에 검은 나무 의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호는 항상 등교하기 전에 약을 먹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늘 기운이 없고 눈빛은 멍했다. 최근에는 탈모까지 생겨서 머리 군데군데에 동전만한 구멍이 허옇게 보였다. 인터넷에 지호가 먹는 콘서* 라는 약을 검색해 보니 ADHD치료제,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
집중력 향상 약, 강남 수험생약, 콘서타 부작용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주르륵 나열되었다.
지호는 수업 중에 헛구역질도 자주 했다. 나는 문밖으로 내 목소리가 들릴까 봐 연습장에 ‘ 괜찮니? 내가 뭘 도와줄까?’라고 적었지만 지호는 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지호는 안색이 심각하게 안 좋았다.
약 부작용인지 호흡이 불안정하고 숨을 커다랗게 몰아 내쉬었다. 나는 가만히 연습장에 ‘좀 쉬어.’라고 쓰고 혼자서 앵무새처럼 수학 문제를 설명하며 과외하는 연기를 했다. 잠시 후 지호가 처음으로 연습장에 글을 적었다.
‘선생님 꿈은 뭐예요?’
나는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나는 박사학위 받고 교수되는 거. 하하하. 장난장난. 그냥 꿈이야 꿈. 지호는 꿈이 뭐니?”
지호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떼더니 또박또박한 글씨로
‘성공, 엄마와 함께 이 집 탈출. 아빠한테서 도망가는 거.’라고 적었다.
수업을 마치고 방문을 나가려다, 다시 뒤돌아 지호가 적은 연습장을 찢고 세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방문 앞에는 여전히 검은 의자 하나와 그 옆에 지호 어머니가 서계셨다.
“선생님, 앞으로 수학 수업 내용 외에 사담은 지양 부탁드려요.”
“네. 죄송합니다.”
단호한 말투와 다르게 내 시선을 급하게 피하는 지호 어머니의 오른쪽 눈가에는 초록 멍과 그 둘레로 노란 얼룩이 나이테처럼 퍼져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뒤로하고 현관을 나섰다.
여전히 황금빛을 뿜어내는 승강기 문이 열리고 나는 순간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서 나의 최애를 영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 고이 접은 연습장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