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월은 아름답나요? #강강약약 한 인생을 꿈꿉니다.
하얀 벚꽃이 짧게 피고 지는 봄이 오면, 사월의 그날이 떠오른다.
“너 과외 알바는 안 지겨워?”
“퍽이나, 지겨워 죽겠지.”
“우리 다른 거 해보지 않을래?”
친구 윤희의 권유로 우리는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이번 기수로 채용된 백여 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이 놀이동산 지하에 있는 소강당에 모였다.
하얀 와이셔츠에 감색 정장 조끼를 단정히 입은 남자가 낮은 단상으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플라스틱 명찰이 형광등에 반사되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교육 강사라고 쓰여 있었다.
삼십여 분 동안 놀이동산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더니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고 했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따라 외칩니다. 놀이동산에 불이 나면!”
“놀이동산에 불이 나면”
백 명의 신입 아르바이트생들은 유치원생처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고하지! 않는다!”
“신고하지 않는……. 네? 엥? “
아르바이트생들은 일동 당황하며 오늘 처음 보는 서로의 얼굴과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렇게 대규모 시설에 여러분들이 동시에 신고하면 일대 교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마비됩니다. 소방차 수십 대가 오면 기자들도 우르르 오겠죠? 그럼, 뉴스에 나오겠죠?
그걸 누가 책임집니까? 여러분이 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우리 자체 소방시설로도 충분히 화재 진압할 수 있습니다.”
”아~~~ “
기껏 해봐야 스무 살 초반인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은 이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자 계속 따라 외칩니다. 놀이동산에 위험한 환자가 생기면! “
”놀이동산에 위험한 환자가 생기면“
“119에 신고하지 않는다!”
”119에 신고하지 안......“
또 한 번의 웅성임이 시작되자마자 마이크에서 강사의 목소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조용! 우리는 자체 보건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주하고 계신 간호사 선생님이 먼저 응급 처치를 하시고, 판단 후 119에 신고하실 겁니다.”
윤희와 나는 교육에서 있었던 일이 꺼림칙했지만 이내 잊고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에 푹 빠졌다.
기구 운영팀보다 식음료 팀이 시간당 보수를 1,000원이나 더 많이 준대서 우리는 식음료 팀으로 지원했다. 나는 구슬 아이스크림 부스, 윤희는 버터구이 오징어 부스에 배정받았다.
이곳은 거대한 규모답게 천 명이 넘는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이 함께 일을 한다.
각자 일하는 시간이 끝나면 암묵적으로 놀이기구도 한 번씩 공짜로 탈 수 있고, 공원 안에서 파는 간단한 디저트도 조금씩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 간의 우정이 생겨나고, 사랑이 싹트는 커플들도 꽤 많았다.
우리는 시간제 근무로 일을 했지만, 놀이동산 아르바이트생만의 특권을 충분히 즐겼다.
윤희와 나는 일을 마치면 재빨리 환복을 하고 새로 생긴 다이너마이트를 타러 갔다.
다이너마이트에서 기구 운용을 하던 19살 건우는 누구에게나 잘 웃고 친절했다.
다이너마이트 단골이 된 우리와 친해지면서 건우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자주 왔다.
건우는 올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이곳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했다. 내 남동생과 나이는 같지만, 철이 꽉 든 건우가 참 기특했다. 그래서 건우가 아이스크림 부스에 오면 가장 좋아한다는 블루 버블맛을 종이컵 한가득 퍼주곤 했다.
다음날, 직원 언니가 출근하자마자 나를 불렀다.
”막내, 너도 이제 우리 팀이 된 지 한 달이 넘었으니, 임무를 주겠어. 쓰레기통에서 구겨지지 않은
아이스크림 종이컵 좀, 최대한 많이 주워와. “
”네? 왜요? “
“일단 시키면 좀 시키는 대로 하자.”
내가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주워 온 종이컵은 직원 언니가 몰래 씻어서 아이스크림 카트 아래 말렸다.
그리고 마치 새 컵처럼 아이스크림을 담아 손님에게 팔았다. 개장과 동시에 서너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엄마랑 아이스크림을 사러 부스로 왔다. 새 컵을 꺼내려는 나를 밀치고 직원 언니는 밝게 웃으며 아이에게 “무슨 맛 줄까”라고 곰살맞게 물었다. 헌 종이컵에 조르르 담겨 아기 입속으로 들어가는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보며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니는 일을 마치고 가려는 나를 불러 택시 타고 가라며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여 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나를 바라보며 이상야릇하게 웃었다.
일을 마치고 나는 유니폼을 다 갈아입지도 못하고 탈의실 바닥에 멍하니 앉아 캐비닛에 등을 기댔다. 내 손에 쥐어진 만 원짜리의 출처를 알게 된 윤희는 나를 말렸다.
”야! 너 나서지 마. 네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져? “
“달라져! 달라져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나는 유니폼을 풀어헤친 채 식음료팀 사무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입구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 직원이 내 옷차림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서 가장 높은 분이 누구세요? 저는 A4번 부스 아르바이트생이에요.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작은 사무실에 비해 흥분한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맨 끝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손가락 네 개를 빠르게 까딱이며 이리로 오라고 했다. 책상 위에는 식음료팀 과장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나는 직원 언니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시킨 행동과 재사용된 종이컵으로 하루 매출을 거짓으로 신고한다는 것을 먼저 말했다. 그리고 오늘 어린 손님에게 헌 종이컵을 준 일, 내가 받은 만원까지 세세히 고했다.
“학생은 대학생이지? 혹시 나중에 우리 회사에 취업할 생각은 없니? 참 대단하네. 내가 학생 이름을 잘 기억해 두지.”
아저씨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가더니 시원한 포도 주스 한 잔을 건넸다. 달콤한 주스에 긴장이 풀린 나를 보며 껄껄 웃으며 이렇게 용기 내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곤 내 이름과 직원 언니의 이름을 물었다.
종이에 나란히 적힌 이름 아래 붉은 볼펜으로 진하게 밑줄을 두 번 긋더니, 잘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직원 언니에게 불려 갔다.
계단에서 담배를 물고 나를 위아래로 꼬나보던 언니는 알바주제에 나대지 말고 조용히 일하자며 어깨를 툭 밀치더니 바닥으로 담배를 던져버렸다. 불똥이 내 허리 높이만큼 튀어 올랐다.
그날 나는 더 이상 일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조퇴를 했다. 나 없이 혼자 오징어를 팔던 윤희는 다른 직원 언니들의 눈총을 하도 받아서 우리가 이번 달 말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전화 속에서 울먹였다.
나와 윤희는 1234번 버스를 타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막바지 주말 꽃놀이를 즐기세요!’라는 라디오 앵커의 말이 무색하게, 벚꽃 한 그루 없는 놀이동산에
최다 입장객이 찍혔다. 직원용 탈의실에서는 오늘 죽었네, 여기밖에 갈 곳이 없냐, 하필 중고생 시험 끝난 기간까지 겹치냐며 여기저기서 푸념이 들렸지만, 젊음의 열정들은 금세 파이팅을 외치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신기하게도 바쁜 시간은 힘듦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다.
윤희와 나는 일을 마치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퇴근 후 옷을 갈아입는데 캐비닛 뒤쪽에서 직원 언니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
“다이너마이트 막내 건우?”
”아 진짜, 어떻게, 어떻게......? “
“쉿! 조용히 해...”
건우는 그날 이후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건우가 기구에 끼어서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건우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해서 며칠간 텔레비전을 켰지만 9시 뉴스에도 건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우리에게 건우가 잊힐 때쯤 중년의 여자가 ‘아들을 살려내라’라는 글씨가 쓰인 커다란 피켓을 들고 놀이공원 매표소 앞에 서 있는 걸 보았다.
내 마음은 확신이라는 커다란 추를 매달고 무거워졌다.
건우와 빼닮은 아주머니의 얼룩진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일부러 빙돌아 며칠간 먼 길로 다녔다.
제 송이를 다 펴보지 못하고 떨어져 짓밟힌 벚꽃 앞에서 나는 사직서와 함께 잔인한 침묵을 선택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