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 - 1
크론드는 얼음으로 뒤덮인 노르하임의 깊은 곳에 사는 드래곤의 무리에게 다가갔다. 용들은 그를 경계하듯 날개에 달린 은빛 비늘을 파드득 떨어댔다. 비늘 소리에 긴장한 크론드는 한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무릎과 종아리를 타고 오르는 냉기를 애써 무시한 채 옷깃 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위대하신 드래곤이여! 당신들께 가장 지혜로운 노족들의 행복한 기억 조각을 받칩니다!"
주머니의 끈을 조심스레 당기자 그 사이로 빛이 아른거렸다. 그 조각 중 하나는 어린 소녀의 것처럼 보였다.
어린 소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볼이 발그레해질 만큼 열이 올라 있었다. 침대 옆에 소녀의 아버지는 걱정 어린 얼굴로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는 차가운 물이 들어있는 대야에 천을 푹 담근 뒤, 손등 위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천을 꾹 짠 다음, 소녀의 머리 위로 조심히 올려놓았다. 이내 큰 잎사귀를 펄럭거리며, 소녀에게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간지러운 듯 소녀는 콜록댔고, 소녀의 아버지는 잎사귀를 탁자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소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고소한 쌀 냄새와 도마에 칼이 통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문 밖, 주방에는 소녀의 어머니가 분주하게 냄비 안으로 야채를 집어넣고 있었다. 냄비 바닥이 타지 않도록 중간중간 주걱을 휘저으며, 그릇을 꺼내 목으로 넘기기 쉬운 국과 반찬을 푸고 있었다.
가장 어린 용이 크론드에게 다가와 사랑받는 소녀의 행복한 기억 조각을 손에 쥐었다. 크론드가 부드럽게 손을 흔들자 기억 조각들이 하늘로 떠올랐다. 작은 빛줄기들은 차가운 공기를 가로질러 드래곤들의 주변을 감싸며 춤을 추었다. 실버 드래곤의 눈에 처음으로 감동의 물결이 번졌고, 그의 차가운 마음속에 오래도록 얼어붙어 있던 행복한 기억들이 살며시 피어났다.
크론드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도 과거의 추억이 그리움으로 물들었고, 따뜻한 감정이 노르하임의 얼음 속에서 잔잔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시, 드래곤들은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큰 실버 드래곤이 거대한 머리를 홱 돌리며 크론드를 향해 울부짖었다. "이런 속임수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겠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노르하임의 얼음처럼 차갑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주변의 드래곤들도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일제히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중 몇몇 화이트 드래곤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그들은 깊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물이 한 줄기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크론드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가 다시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빛의 조각들을 날리자, 조각들은 공중에서 서로 얽히며 더욱 강렬하고 찬란한 빛을 발했다. 이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조각에 얽힌 삶의 이야기, 기쁨과 슬픔, 사랑과 아픔이 빛 하나로 어우러져 허공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며칠 후
노르하임의 밤하늘은 별빛으로 가득했고, 차가운 공기가 대지를 감싸 안고 있었다. 노족들은 며칠 만에 다시 진지한 논의를 이어갔다. 모닥불의 불꽃이 하늘을 향해 춤추는 동안, 그 따스한 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중심에는 크론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크론드,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드래곤들의 태도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소." 한 남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기억 조각만으로는 부족해요." 한 여성이 말하며, 불꽃 속에서 반짝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여준 기억 조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아니면 노르하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른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크론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노족이 드래곤과 함께 노르하임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거나, 에라스를 되찾아야만 했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는 함께할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젠 행복한 기억 조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크론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단호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논쟁 속에서도 그들은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 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공기 속에서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노르하임의 척박한 땅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야 할지가 문제였다. 이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본래 터전인 중앙의 땅 아레스로 돌아가기는 당분간 불가능했고, 기억 조각만으로는 드래곤들과의 협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 중년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드래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알아내어 조달해 주는 것은 어떤가요?”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것은 같은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도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하면 좋을 듯합니다. 계속 노르하임에 머무는 것보다, 새족, 하족, 그리고 마족의 땅으로 몇몇은 떠나 자리를 잡는 것이죠.”
그들의 말에 모두 활기를 띄었다. 크론드는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먼저 무역을 통해 기반을 마련하고, 그 사이에 방법을 마련해 다시 모든 노족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아레스로 다시 돌아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 길이 비록 험난할지라도, 그것이 노족이 다시 한번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두 번째 걸음임에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