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방송작가에게 하는 부탁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혜화동’ 노래 가사처럼 만났으면 둘은 어떤 얘기를 할까? 혹, 돈 빌려달라는 소리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나도 알고 지내던 친구에서 전화가 왔고, 곧 결혼한다고, 함께 봤던 홍대에서 만나자 길래 나갔다. 내게 청첩장을 내밀며 친구가 하는 말에 놀랐다.
“방송작가니까 연예인 많이 알잖아. 결혼식 때, 네가 아는 아이돌 시켜서 축가 좀 불러줘.”
방송작가 인맥으로 무료로 결혼 축가를 부를 아이돌가수를 섭외해 달라고 했다. 방송작가라고 연예인 하고 친한 건 아니다. 한 건물에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다른 부서 사람과 인사만 나누듯, 넓은 방송바닥에서 바람처럼 한 번씩 스쳐간다. 축가를 부탁할 친한 아이돌가수가 없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친구는 내 말뜻을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도 염치가 있지. 유명한 아이돌을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아이돌이면 돼. 결혼식 날 시간될 때, 딱 한곡만 부르고 가면 돼.”
이 정도면 자신이 충분히 양보했다는 듯이, 친구는 나를 바라봤다.
아는 아이돌이 없거니와 무료로 결혼식 축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할 사람은 없다며, 예식장에서 알아봐 주는 축가 가수들이 있으니까, 알아보라고 했다. 친구는 섭섭해했고, 그 애 앞에서 나는 연예인도 마음대로 못 부르는 능력 없는 방송작가가 됐다.
“내가 요새 국밥집 새로 열었거든. 이영자 우리 국밥집에 데리고 와. 우리는 어렵지마는 누나 딸 방송작가니까 안 쉽겠나. 이영자 데리고 오마 맛집이라고 좋아할 기다.”
10년 넘게 연락이 없었던 먼 친척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부탁을 했단다. 엄마는 내게 말하지 않았고,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엄마에게 전화해 직접 얘기하겠다며 휴대폰 번호를 달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엄마가 내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전화번호를 친척에게 줘도 되지만, 이영자를 나도 TV에서만 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했다. 친척한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속으로 나를 괘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후배작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친구기 낡은 집을 개조했단다. 그 집이 매매가 안돼, 속상하다며, 팔 수 있게, ‘구해줘! 홈즈’ 연결해 달라고 했단다. 작가들이 섭외하니까, 그 작가에게 부탁해달라는 거였다. 후배작가는 그 팀 작가를 아무도 모르지만 혹시 안다고 해도 부탁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일과 관련해서 작가들은 사적인 부탁을 하지 않는다. 특히 아이템은 방송의 시청률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 정도도 못 해주냐고 생각하지만, 그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거절을 하면, 상대는 말로는 괜찮다지만 섭섭해한다.
'방송작가인데 왜 연예인과 결혼 안 해' 제목으로 예전에 쓴 글처럼, 연예인과 친한 피디, 작가의 얘기 몇 개만 듣고, 그걸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방청권을 구해 달라. 연예인 사인을 받아 달라. 신문사에서 글을 써와야 실어준다고 했다며, 다른 사람 이름으로 나가는 미술 작품 홍보 글을 기사처럼 써 달라. 아는 사람이 트로트 가수로 데뷔를 했는데 출연시켜 달라. 친한 사람이 아니라, 한두 번 만난 사람으로부터 부탁 전화를 받는 경우도 꽤 있다.
나는 거절을 못했고, 부탁을 들어주려고 애쓰며 허둥댔다. 하지만 이제 거절한다. 오랜만에 나타나 청첩장을 주고, 결혼식에 꼭 오라고 해놓고는 결혼식에 참석한 후에는 연락하지 않는 친구처럼, 연락을 끊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사람이 내 옆에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둔다. 이제는 내가 나에게 하는 부탁이 뭔지 귀 기울이고, 그 부탁을 들어주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