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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by 일상온도

어릴 땐 그렇게 믿었다.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더는 친구에게 무시당하지도 않을 거고, 선생님 앞에서 주눅 들 일도 없을 거고, 가족 안에서 숨죽이지 않아도 될 거라고. 어른이 되면 누군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거고, 내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줄 거고,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거라고. 그래서 버텼다. 지금은 조금 힘들어도, 나중에는 좋아질 거라고. 미래는 더 나을 거라는 희망으로 그 시간을 건너왔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오히려 더 복잡했다. 눈치를 보는 일은 줄지 않았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 감각은 더 까다로워졌고, 감정을 숨기는 일은 더 정교해져야 했다. 사회라는 이름의 세계는 어릴 적 학교보다 훨씬 더 뚜렷한 위계와 암묵적인 규칙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언제 웃어야 하는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계산해야 했고, 그 계산에 한 번만 실패해도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아무도 '괜찮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것에 얽매이게 되었다.

감정을 드러내면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고,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 비협조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도, 회사에선 웃어야 했고, 슬퍼도 마감은 지켜야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내 감정을 알아차려주지 않았고, 그걸 표현하는 나를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감정은 사적인 것으로 분리되었고, 일과 관계는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계산되었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표현하면 짐이 되고, 참으면 사라지는 감정들 속에서.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그렇게 힘든 하루를 끝내고 돌아와도, 어디에도 온전히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친구에게 털어놓기엔 너무 깊은 이야기였고, 가족에게 말하기엔 이미 오래전부터 거리감이 생겨 있었다. 결국 나는 늘 나에게만 털어놓았다. 괜찮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며 버텼다. 이쯤이면 괜찮아져야 한다고,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어른이니까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 채, 점점 무뎌졌다.

감정을 꺼내지 않게 되었고,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고, 무너지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연습했다. 어릴 때는 말할 상대가 없어서 조용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마음이 남지 않아서 조용했다. 그게 바로 어른이 된다는 것이라면, 나는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어른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감정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 무게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다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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