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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결국, 말하지 못한 감정이 나를 만들었어요

by 일상온도

한 시절을 돌아보면, 그때 나를 움직이게 했던 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표현하지 못한 서운함, 삼켜버린 분노, 그냥 넘긴 억울함, 끝내 내뱉지 못한 사랑과 미움. 겉으로는 무던해 보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모든 감정들이 여전히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흔들림을, 어쩌면 나라고 믿고 살아왔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았다. 때로는 ‘예민함’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라는 방패로, 혹은 자책과 방어, 회피와 분노 같은 모양으로 내 삶을 잠식해 갔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어떤 말에 괜히 날카로워지고, 어떤 상황에서 이유 없이 지치고, 어떤 관계에서 스스로를 밀어내듯 멀어졌다. 그건 단지 감정 조절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하고 쌓인 감정들이, 그제야 틈을 비집고 터져 나온 것이었다.

감정을 꺼낸다는 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걸 두려워해왔다. 감정을 말하면 약해 보일까 봐, 혹은 그 감정을 누가 무시하거나 오해할까 봐. 그래서 입을 다물었고, 대신 감정은 내 몸 어딘가에 눌러앉았다. 때로는 두통으로, 때로는 불면으로, 어떤 날은 가슴속 답답함으로.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결국 나를 만들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는 안다. 감정을 꺼내는 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라는 걸. 말하지 않는다고 강한 게 아니고, 말한다고 해서 무너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오히려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나 스스로와 연결시키는 것이 진짜 나를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걸. 그렇게 감정을 만나기 시작한 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를 타고 지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나는 그 감정들을 다시 나로 만들어가려 한다.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 감정들 속에 숨겨진 나의 진짜 얼굴을 바라보며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나도 괜찮지 않았다고,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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