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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n 03. 2024

폐허의 미학, 부암동 백석동천

창의문 밖 성곽마을, 부암동 여행 2


바위 틈새로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들리시나요?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 것 같지요?^^ 하지만 이곳은 놀랍게도 1 급수 지표종인 도롱뇽, 버들치가 집단 서식하고 소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서울 한복판' 종로구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입니다.      


창의문 밖 성곽마을인 부암동은, 인왕산과 백악(북악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만들어낸 청계동천, 삼계동천, 백석동천 같은 빼어난 경관을 품은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멋진 자연풍광을 가진 곳이라면 어디든 누정(樓亭)이 세워지거나 별서(別墅, 별장)가 들어서기 마련이었는데요, 부암동 역시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려는 사대부의 취향에 임금이 계시는 도성과 가깝다는 입지 조건이 더해져 일찌감치 별서 터로 주목을 받았지요. 지난 글에 소개한 청계동천(무계동)의 무계정사(안평대군 별서)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 별서인 석파정(김흥근 별서), 부암정(윤웅렬 별서), 백석정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부암동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백석동천과 그곳에 세워졌던 백석정을 비롯한 별서의 흔적을 찾아 함께 떠나보실까요?^^




2004년의 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소추를 당합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직무가 정지된 채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을 기다리는 유배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던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하루는 숲길을 헤치고 걷다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너른 터가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스러져가는 돌계단, 집의 초석 등 돌무더기가 어지러이 널려있고 퇴락한 연못과 정자의 주춧돌이 펼쳐져 있었다고 하지요. 놀라움에 그는 부인과 비서를 차례로 데리고 다시 그곳으로 갔는데 하나같이 그 광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 선생까지 부르게 되었는데요, 그 역시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양도성의 북쪽 산인 백악은 1968년 1·21 사태(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들어가 2007년 부분 개방 전까지 엄격히 통제되어 왔기에 급속도의 경제개발 속에서도 사람의 극성스러운 관심과 손길을 피해 청정구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곳입니다. 꽁꽁 숨어있던 백석동천과 별서 터는 이런 사연으로 인해 비밀의 문이 열리고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지요.      




백석동천과 별서 터로 가는 길은 크게 창의문 밖 환기미술관 쪽 방향에서 백석동길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과 세검정 쪽에서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든 서울 한가운데라고는 믿기지 않는 자연경관과 고즈넉함, 개성 있는 집과 고불고불 산길을 만나게 될 테니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은 환기미술관과 이웃하고 있는 정갈한 밥집, ‘소소한 풍경’의 가지찜을 맛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주택을 개조한 외관 덕분에 환기미술관을 몇 번이나 방문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했지요. 눈에 확 들어오는 간판으로 손님을 불러들이는 여느 식당들과 달리 '어디 한번 찾아보시던가' 하는 듯 여유(?^^)가 느껴집니다.

      

간 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가지찜이 일품인 '소소한 풍경'은 맘먹고 찾아가기 전엔 발견하기 어렵지요. 백석동천처럼 말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백석동길 산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식후 산비탈이라니 동선을 잘못 잡은 것 아니냐고 의아해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등반이 아닌 배 꺼트릴 정도의 산책 느낌이니 염려 놓으시길요.^^ 주변 경치에 한눈파는 사이 이내 예쁜 카페 앞에 당도합니다. 이미 꽤 알려진 곳으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의 이선균 집으로 인상 깊었던 ‘산모퉁이 카페’이지요. 카페의 테라스에 서면 손에 잡힐 듯 코앞에 인왕과 백악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한양도성 성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커피는 그저 덤일 뿐이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최고의 경치를 음미한 만족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련 없이 왔던 길을 따라 도로 내려가 버립니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말이지요~   


산모퉁이 카페 테라스의 왼쪽으로 백악, 오른쪽으로 인왕이 펼쳐지고 구불구불 한양도성 성곽이 선명히 눈에 들어옵니다.  


산비탈을 마저 오르면 ‘백사실’이라 선명하게 적힌 길바닥 이정표가 나타납니다. 드디어 비밀의 문이 열리고 백석동천 계곡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지요! 고즈넉한 숲길로 내려서면 단 몇 발자국 차이인데 기온도 공기도 분위기도 확연히 달라집니다. 곧 '白石洞天(백석동천)'이라 새긴 우람한 바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백석동천의 ‘백석(白石)’은 산 이름인 백악을, ‘동천(洞天)’은 신선이 사는 좋은 경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백석동천을 동네 주민들은 '백사실계곡'이라 부르고 있는데 ‘백석실(白石室)’에서 와전된 발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석동천, 백석곡, 백석실, 백사실 등 이곳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합니다. 저 막다른 골목 왼쪽으로 돌아서면 '백석동천'이 시작되지요.

     


이 각자 바위에서 계곡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갑자기 물소리가 들리고 장대석 두 개를 걸쳐 놓은 돌다리가 나타납니다. 과거로 순간 이동하듯 건넙니다. 그리고 다시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짜잔~ 너른 집터에 ㄱ자 건물의 초석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습니다. 연못을 향하도록 누마루가 설계된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사랑채 모습입니다. 빈 공터는 안채가 있었던 자리였겠지요. 사랑채 건물 터 옆으로 제법 규모 있는 둥근 연못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 연못 아래로 발을 담그고 있는 주춧돌은 분명 사라진 정자의 기둥이었겠지요. 아~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이를 두고 '폐허의 미학'이라 했던가요? 아무것도 없지만 많은 것이 있고, 아무 말도 없지만 많은 것을 말해주는. 제 아무리 좋은 것들로 채워 넣어 본들 이 빈터의 아름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들끓던 잡음들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아련히 상념에 잠깁니다. 돌다리 하나 건너 신선의 세계로 이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 세계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가는 비현실적인 경험이라니요!                               

     

신선이 놀다간 흔적일까요?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별서를 짓고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폐허가 된 별서를 통해 주인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요. 심지어 백사실계곡이란 이름과 백사(白沙) 이항복의 호가 일치하는 바람에 한동안 이항복의 별서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니까요.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2년 백사실계곡의 별서가 이항복의 소유였다는 오랜 추정이 아무 근거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 별서의 역대 주인 중 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1786~1856)라고 밝힙니다. 김정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제9권에 수록된 「금헌이라는 친구와 읊은 10수의 시」에 수록된 내용이 그 근거가 되었는데요,  

    

구구한 문자에도 정령(영혼)이 있으니 

'선인(신선)'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샀다네.     


라는 부분입니다. 이 시에 김정희는 이런 주석도 남깁니다.      


나의 북쪽 별서를 말한다. 

'백석정 옛터'가 있다.     


그렇다면 백석정의 이전 소유자라 여겨지는 ‘선인’은 누구일까요? 강세황의 친구로 함께 산수화를 그리고 강세황의 그림마다 평을 남긴 연객 허필(1709~1761)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2021년에는 국가유산청이 ‘명승 지정 별서 정원 11개소 역사성 검토 결과’를 공개하면서, 애사 홍우길(1809~1890)이 백석동천 일대 백석실을 소유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공시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 공시문만 봐서는 김정희 소유 이후에 홍우길이 소유했다는 것인지 전후 관계가 확실치 않아 백석정 주인을 두고 여전히 논란이 진행 중이 아닌가 추측하게 됩니다. 자료를 더욱 치밀하게 검토해 조성자와 역대 소유자를 정리해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백석정에 대한 놀라운 기록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이는 동아일보가 공개한 한 장의 사진인데요, 백석정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19일 자 기사에 ‘백석곡 팔각정자’ 화보 사진이 떡하니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7년부터 간행해오고 있는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 백석정은 6·25 전쟁으로 사라졌고 별서는 1970년경 허물어졌다고 하니 그렇다면 백석정과 별서가 꽤 오랫동안 건재했다는 사실이 됩니다.

   

안채는 4량(樑) 집이며 1917년 경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ㄱ자 5량 집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가 높던 바깥채(사랑)가 있었으나 1970년 경 허물어졌다. 집 전체는 문양을 넣은 돌담과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집 앞에는 연못이 옛 그대로 남아 있는데 연못가에 지었던 정자는 6·25 동란 때 없어졌다. 『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Ⅰ』- 종로구 편(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동아일보 1935년 7월 19일 자 기사에 놀랍게도 ‘북악 8경’ 중 하나로 ‘백석곡 팔각정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육각정을 기자가 오인한 것 같네요. 
이제 사진 속 백석정은 허물어지고 없지만 주춧돌은 단단히 박혀 과거를 말해주고 있지요. 


백석동천 여행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백악에서 발원한 백석동천의 맑은 물줄기는 이 비밀의 정원을 지나 홍제천으로 이어집니다. 계곡을 따라 홍제천, 세검정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의 풍경 또한 일품입니다. 여느 계곡, 여느 산길과 다름없는 풍광이지만 이곳의 정취가 남다른 이유는 물길이 지나는 너럭바위마다 언제부터인가 아담한 절집과 살림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찰찰찰 철철철 흐르는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들 집들이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합니다. 


도심 한가운데 숨은 자연 풍광에 감탄하다 보니 어느새 백석동천 물줄기가 합류한 홍제천에 다다릅니다. 저만치에서 세검정도 얼굴을 삐죽 내미는군요. 반나절만에 자연과 복잡한 도심을 번갈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이것이 부암동의 매력이지요. 백석동천 물줄기가 홍제천으로 합해지고 다시 한강, 그리고 서해로 가는 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의 백석동천 여행은 이제 마무리해야만 하겠지요?^^   


세검정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의 풍광도 일품입니다. 너럭바위와 그 사이로 흐르는 백석동천의 물줄기, 아담한 집들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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