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비교의 대상이 되는 동아시아 세 나라가 있지요. 한국, 중국, 일본입니다. 서로 인접한 나라이니만큼 생활양식이나 풍습에 있어 닮은 점이 많은 세 나라입니다만 다른 면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가운데 위치한 한국이 나머지 두 나라와 생판 다른 문화를 가진 것도 있어 흥미롭지요. 그중 하나가 차 문화인데요. 차가 일상에 완전히 녹아든 두 나라와 달리 한국인은 어째서 차보다 커피만 주야장천 마시게 된 걸까요? (사실 저도 눈만 뜨면 커피부터 찾습니다. ㅡ.ㅡ)
세종대왕께서도 그것이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대체 중국인들은 어째서 차를 저렇게 마시고, 우리는 이처럼 안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선조께 조선은 왜 차를 만들어 무역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조선 산야에 널려있는 차나무가 잡목 취급받는 것에 놀라서 말이지요. 또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는 일본인들이 날마다 나눠주는 지급품에 차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길가에서 차를 끓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많고 어딜 가서 앉으면 일본인들은 차부터 내어왔으니까요. 오히려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은 차를 마시지 않는데도 어떻게 병에 걸리지 않느냐고 물어옵니다. 중국인과 일본인, 조선인 스스로도 차 문화에 관한 한 한결같은 의문을 가진 셈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차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의식과 함께 차 마시는 문화가 성행합니다. 이는 불교문화가 꽃핀 고려 시대에 더욱 만개하는데요, 다소(茶所)를 두어 차를 재배하고, 다방(茶房)을 설치해 국가 행사에 차를 올렸지요. 일반 백성도 차를 즐기긴 마찬가지여서 지금의 카페 같은 다점(茶店)이 만남과 휴식의 장소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청자의 수요가 늘어난 것도 이러한 차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출토된 청자 중 차를 마시는 그릇, 다완(茶宛)의 비중이 적지 않습니다.
꽃잎 모양 잔 받침에 살포시 올려놓은 찻잔, 우아함의 극치이지요.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고려 중·후기로 갈수록 차 마시는 풍속이 날로 사치해집니다. 조정의 차세(茶稅) 핍박도 극심해져 백성의 고통이 상당했구요. 백성들이 차나무에 불을 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차로 인한 백성의 고통과 원성을 의식한 새로운 나라 조선은 차를 퇴출시킵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에 따라 불교가 억눌리고 검소한 생활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가 더해져 차 문화는 급격히 쇠퇴하고 맙니다. 점차 차를 마시는 기호뿐 아니라 다구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지요.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시서화를 즐기는 양반들의 소소한 모임이나 승려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차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양이 아닌 땅끝 강진에서 르네상스를 맞이합니다. 그 중심에 1801년에 강진으로 유배가 18년을 보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있었습니다.
다산의 삶을 바꾼 강진에서의 만남들
남도 답사 1번지라 불리는 강진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다산 정약용을 찾아가는 여정은 필수 코스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산을 흠모하는 이들이 반드시 찾게 되는 곳도 강진이지요.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보다 유배지인 강진에 다산의 흔적이 더욱 선명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산은 강진에서 삶을 바꾸는 만남들을 거듭합니다. 오갈 데 없는 유배객에게 주막의 뒷방 한 칸을 선뜻 내어준 인정 많은 늙은 주모가 그 첫 번째이지요. 실의에 빠져 술로 하루를 보내던 다산은 주모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묵직한 한마디에 정신이 들어 몸과 마음을 다잡습니다. 4년 동안 머문 그 방을 다산은, '4가지(생각,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곳'이란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라 불렀지요.
사의재에서 다산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惠藏, 1772~1811)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유배 전부터 차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던 다산은 유배 후 건강상의 이유로 차가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차를 음료보다는 약용으로 썼던 것이지요. 그래서 혜장에게 차 만드는 법을 일러주며 구해주기를 청합니다.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로는 직접 차를 만들어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 만드는 법도 가르치지요. 그의 호인 다산(茶山)은 초당이 위치한, 차나무가 자생하는 만덕산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혜장은 다산보다 10살 아래였지만 유학에 식견이 높아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차를 나누는 다산의 유일한 벗이었습니다. 혜장은 강진에서 다산의 삶을 바꿔놓은 두 번째 만남이라 할 수 있지요. 혜장이 기약도 없이 초당을 찾아오곤 해서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혜장은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집니다. 정다운 벗을 잃은 다산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6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귐은 글과 차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만남이었지요.
마당에 차를 달이던 널찍한 돌판(다조)만이 그때 모습 그대로 다산초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의 모습인데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요?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만덕산 오솔길을 걸어봅니다. 벗을 찾아가는 즐거운 발걸음에 내 걸음을 포개니 200년 전 그들과 한층 더 가까워진 것만 같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차나무와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800m 산길을 느긋하게 걷습니다. 경사가 완만해 30분이면 어렵잖게 백련사에 도착하지요. 백련사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 군락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3~4월이면 땅에 떨어진 동백꽃이 카펫을 깔아놓은 듯 아름답지요. 그 붉은 색감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호승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 명명한 다산박물관에서부터 초당까지의 길을 걷지만 정작 초당에서 백련사까지의 길을 가보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혜장이 홀연히 세상을 등진 이듬해 다산은 7년 전 실패한 월출산 등정에 재도전합니다. 24살 아래의 초의선사(艸衣, 1786~1866)와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말이지요. 초의는 우리나라 다신(茶神)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젊은 시절 다산으로부터 차 만드는 법을 배우고 이를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으니 이 만남 역시 강진에서의 소중한 인연이지요. 암튼 다산의 두 번째 월출산 등정도 녹녹지 않았는데, 다산은 이번에는 정상 등정에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러자 정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차오르고 여유로웠지요. 그제야 7년 전 산행이 공연한 욕심으로 기운을 부린 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정상 등정을 접고 하산하던 다산 일행은 월출산 남쪽 자락 백운동 별서(지금의 별장)에서 하룻밤 머물게 됩니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백운동 별서 정원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다산은 백운동의 12가지 풍경을 시로 짓고 초의에게는 「백운동도」를 그리게 해 『백운첩(白雲帖)』으로 엮습니다.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디가 더 아름다운지 겨뤄보고 싶은 마음에 다산초당을 그린「다산도」도 함께 싣습니다. 이것을 유숙한 데 대한 답례로 백운동 별서 주인 이덕휘에게 주었지요. 이「백운동도」가 최근 백운동 별서 정원을 복원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합니다.『백운첩』을 비롯한 백운동 별서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다산의 서신과 백운동을 다녀간 쟁쟁한 문사들의 시문을 발굴·연구해 세상에 알린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강진 백운동 별서정원』(2015, 글항아리)에서 하마터면 잊힐뻔한 백운동 별서정원의 조경적 가치와 우리나라 차 문화 부흥의 한 축으로서의 의미를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 생생히 밝혀내고 있지요.
백운동 별서정원은 호남 전통 원림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 전통 별서 중 가장 풍부한 기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큽니다. 복원에 기여한 초의의「백운동도」와 비교해 보시길.
백운동 별서의 정자, 정선대에 올라 바라본 월출산 옥판봉의 자태가 신비롭습니다. 다산은 백운동 12경 중 제1경으로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을 꼽았지요.
이렇게 백운동과 인연을 맺은 다산은 이덕휘의 아들, 이시헌(1803~1860)을 초당으로 데려와 강학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는 당시 겨우 10살에 불과한 가장 어린 제자로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가지요. 그는 백운동 별서 옆 대나무숲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채취해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떡차를 만들어 서울로 보냅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해마다 차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킨 이시헌과의 만남 역시 다산의 삶을 바꾼 강진에서의 귀한 만남이지요.
서로 떨어진 것이 800여 리라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데 편지가 통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네그려...... 그대가 부지런히 애써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편지를 보내주니 충후하고 자상한 기운이 글 위로 넘쳐나 편지를 쥐고 여러 번 보며 차마 손에서 놓지를 못하였다네. 다만 안타깝기는 그 훤한 모습을 만나볼 수 없는 것일세. 가을 들어 어버이를 모시는 일은 별일 없고 학업은 날마다 부지런히 하시는가?...... 내년 봄 별시 때는 나라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볼 테니 기일보다 10여 일 먼저 이곳에 와서 머물며 함께 강론하다가 때에 맞춰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열초의 답장, 1824>
열초는 정약용의 다른 호입니다. 제자 이시헌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편지이지요. 과거시험에 앞서 요령과 요점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스승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강진의 제자들에게 다산은 일타강사 그 이상이었지도 모릅니다.^^;
나는 전처럼 기운이 떨어진 데다 근래 들어 풍까지 더해져 목 부위를 못 쓰니 더욱 못 견디겠네. 차(茶)의 일은 이미 해묵은 약속이 있었으니 이번에 환기시켜 드리네. 조금 많이 보내주면 고맙겠군. <두릉에서 보내는 안부편지, 1827>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어렵사리 도착했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근년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 심해져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이시헌에게 주는 편지, 1830,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정민, 글항아리)>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1830년의 편지에는 차 만드는 법이 아주 구체적으로 적혀있습니다. 다산이 차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도 느껴집니다. 차는 다산이 제자들을 양성하고, 『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 권에 달하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해 나가는 동안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술 대신 차를 마시는 생활을 즐기면서 다산은 머리도 맑아지고 혹독한 국문으로 생긴 지병도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75세까지 장수했지요.
강진에서 르네상스를 맞은 차, 그 맥을 이어가다.
다산의 차 만드는 법은 차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린 초의선사에 이르러 크게 부흥해 한동안 잊혔던 우리나라 차 문화는 르네상스를 맞게 됩니다. 한편 백운동 별서 이시헌의 후손들에 의해 생산되던 차는 일제강점기 그 집안의 이한영(1868~1956)이 만들어 판매한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로 그 맥이 이어집니다. 지금은 이한영의 고손녀가 계승해 이한영 전통차문화원과 백운차실을 운영하며 백운동 차 문화의 전통을 잇고 있지요. 차로 유서 깊은 백운동 별서 옆에는 현재도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규모 차밭이 조성되어 우리나라 주요 차 생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강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백운차실에 들러 전통과 가업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 감사하며 다산처럼 천천히 백운옥판차 한 잔을 음미해 봅니다.
다산의 제자 이시헌과 그의 후손들에 의해 차맥을 이어가고 있는 백운차실에 들러 차향처럼 진한 사제간의 정 한 모금을 음미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