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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Sep 25. 2024

왕을 만나다

칸나가 모처럼 마을로 내려간 난쟁이들과 아침 일찍 헤어지고 혼자 집 앞에서 약초와 버섯을 말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듯하더니, 여러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난쟁이들이 돌아올 때는 아니었으며, 그들은 말을 타지 않았다. 

인기척에 당황하던 칸나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까지 올까? 오게 되면··· 저 집을 보고 이런 외딴곳에 왜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까? ...아니, 분명 마녀라고 생각할 거야. 그럼 난···’



칸나는 복잡한 마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지오니가 죽고 난 이후에 (난쟁이들 제외) 처음 맞는 외부인이었다.


말을 타고 여럿이 움직인다면 기사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무기도 지니고 있을 테고, 여럿은 마녀인 칸나라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그때 말 한 마리가 덤불숲을 뛰어올라 달려왔고, 놀라 몸을 돌린 칸나의 등 뒤로 급하게 주인이 말을 멈추고 얼른 내렸다.



“정말 미안해.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아니.. 다쳤다기보단 놀란 것 같네. 진심으로 사과할게.”


“······”



예상과는 다른 남자의 말투에 멍하니 있던 칸나는 조심스레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6피트의 키에 다부진 체격과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외모의 청년은, 사냥을 한다기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차고 있는 칼집과 허리띠에 박힌 보석들만 해도 난쟁이들이 일 년은 꼬박 수고하고 팔아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칸나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그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선이 마주치고, 한참을 멍하니 칸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서 살아?”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던 칸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칸나와 주변의 모습을 살피다 조심스레 그녀에게 마녀인 것인가, 물었다.


깜짝 놀란 칸나는 뒷걸음질 치며 달아나려 했지만 금세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얼른 다가와 칸나에게 손을 내밀며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야. 나로서는 마녀에 관해서 이야기로 들은 게 전부라.”



제르만에서 마녀에 대해 들었다면, 대부분이 아이들을 겁주려 만든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다수일텐데.

남자의 말은 오히려 칸나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요······”



눈을 피하며 경계심을 드러내는 칸나에게 그 남자는 아까보다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만나보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다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너는 내가 들은 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르기도 하고.”

“정말.. 아름답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칸나를 일으키고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제르만의 왕, 리온 오토른이야.”




<결혼을 청하다>



리온은 자신과 함께 온 사람들을 모두 궁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가신들이 신원이 명확지 않은 이와 호위도 없이 함께 할 수 없다며 난리였지만, 리온은 모두를 입 다물게 만들었다. 

가장 최측근인 기사 한 명만을 곁에 남게 했으나, 칸나와 둘이 있고 싶었던 그는 이내 기사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두었다. 


리온은 칸나의 앞마당에 놓인 의자에 마주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사냥을 나왔고, 사슴을 쫓다 국경 근처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까지 들어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이런 외딴곳에 칸나가 사는 것이 마녀에 관한 차별 때문인지를 물었다.



“.........”



리온은 이야기를 꺼려하는 칸나를 눈치채고,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칸나의 긴장과 경계를 풀어주기 위해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미소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녀의 모습 덕분인지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해가 저물고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던 리온은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된 만남은 확실하게 둘을 친밀하게 만들어주었다. 

리온은 사냥과 국경의 경비를 확인한다는 핑계로 매주 칸나를 찾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눴다.


사실 칸나는 리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마녀이고 혼자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온은 좋았다.


칸나의 눈동자가,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리온의 모습은 정말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칸나 또한 리온이 자신에게 보여준 호의가 싫지 않았다.


올 때마다 수줍게 내미는 꽃다발도, 먹어보지 못한 왕실의 디저트도, 좋아하는 책을 가져다주는 것도, 만나러 올 때면 보이는 환한 미소와 더불어 헤어질 때 아쉬워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모습 전부가 다 칸나에게 새로웠고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만남은 지속되었고,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리온은 자신의 마음이 적힌 편지와 아름답게 세공된 루비 목걸이를 건네며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낯선 사람, 자신 또래의 첫 이성. 칸나가 빠져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많은 염려들이 있었지만 그 또한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만류하는 난쟁이들을 뒤로하고 칸나는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출발하는 날, 난쟁이들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며 멀리 달아나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칸나는 그런 난쟁이들의 걱정을 알면서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한 칸나는 그들에게 꼭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마차에 올랐다.




<귀족들과의 만남>



위라티 왕국의 왕녀와 혼담을 밀어붙이던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리온의 행보에 황당함과 함께 분노를 표했다.

리온이 제정신이냐는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천하디 천한, 노예로도 취급받지 못하는 마녀. 

가까이 가면 저주받는다는 소문의 근원지.

그들에게는 제르만에 아직 마녀가 눈에 띄는 곳에 남아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런 마녀와 결혼을 발표하다니.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사람을 마녀로 정하다니.


화가 난 귀족들의 항의에도 리온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를 말려도 보고, 어르기도 해 보고, 온갖 방법으로 회유를 거듭하던 귀족들은, 결국 '백설공주가 좀 더 성장할 때까지' 혹은 '리온의 열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지켜보자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체 얼마나 빼어난 미녀이길래 리온의 마음을 흔든 걸까. 

귀족들은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품고 칸나를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칸나와의 첫 대면일.

그들은 모두 칸나의 자존감을 꺾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성 안에 들어섰다.



"....!....."



아름다운 칸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그들은 칸나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귀족들은 칸나의 보라색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원래부터 보라색 머리인지를 비꼬듯 물으며, 가늘게 뜬 그 눈은 칸나를 몹시 업신여기고 있었다.


칸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원래는 보라색 머리가 아니라고 하자, 어떻게 머리카락을 보라색으로 염색할 수 있는 거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머리카락 색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인지 묻자, 귀족들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앞다투어 불평을 쏟아냈다.



“보라색 머리는 없습니다. 보라색 머리는 괴물이거나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혼자서 모두와 다른 머리 색깔을 하고 있다면 위화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이제 왕비가 되신다면요.”



이에 칸나가 머리색을 바꾸면 이런 논란이 그치는 것인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다시 흥분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그런 머리색을 하고 이 궁에 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머리색이 그리 쉽게 바뀌는 것입니까? 옷도 아닌데 염료를 입히다니···!”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는 리온의 불편한 심기에 마지못해 렘슨 백작이 입을 열었다.



“원래의 머리색은 무슨 색깔입니까?”



칸나는 문제가 되는 것은 보라색 머리이지, 원래 머리색이 아니질 않냐고 대답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그녀의 머리가 보라색이 아닌 다른 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비꼬았다.


보라색이라고 난리.

염색을 하겠다고 해도 난리.

원래 머리 색깔은 이렇지 않다고 해도 난리.


지지부진한 말싸움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들 해!”



결국 화가 난 리온이 소리를 질렀다.

마녀이든 아니든, 보라색 머리든 아니든, 자신이 선택해 데려온 사람인데 다들 비난만 해서 어쩔 것이냐는 그의 말에 다 같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참을 수 없는 듯이, 계속 분노를 쏟아내는 리온의 앞으로 스카드*가 나와 말문을 열었다.

*스카드 폰 프로이센 공작. 제르만의 유일한 공작 가문의 젊은 가주. 미남으로 정평이 나 있다.



“좋은 방안이 있습니다.”


“··· 말해봐.”



칸나를 흘깃보던 스카드는 리온에게 미소로 묘한 방법을 권유했다.



“저희가 전하의 위신도 세우고, 새로 왕비가 되실 분의 마음도 상하지 않게 하며, 저희들 또한 합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방법은?"


"왕비가 되실 분의 머리카락을 전부 잘라, 새로 날 머리의 색을 확인하자고는 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그 머리카락을 감추면 어떻겠습니까.”



차분하고 현명한 듯한 그의 이야기에 모두들 술렁였다.

미소를 만면에 걸친 그는, 얼핏 좋은 사람인 듯 보였으나 눈빛은 칸나를 몰아세우던 그 어떤 귀족보다도 어둡고 차가웠다.



“감춘다고?”



칸나가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하는 가운데 스카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보라색 머리카락을 감출 수 있는 옷을 입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들도 더 이상 머리색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고, 새 왕비님께서도 소중한 머리카락을 지키실 수 있으며, 전하께서는 귀족들의 반대가 사라지니 평화롭고요.”



칸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모자를 쓰라는 이야기인가?’



리온은 스카드의 말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칸나의 의견을 물었다.



“음...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 같네. 칸나, 당신의 의견은 어때.”


 

리온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조금 전까지 칸나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던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눈빛을 피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스카드의 발언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 같았다.

칸나만 모르는 담합...


하지만 왕과 귀족들이 납득한 이상 계속해서 논쟁을 펼쳐봐야 칸나의 손해였다. 


귀족들의 분노와 트집잡기로 이루어진 이 상황에는 속상하고 화도 났지만, 결국 참고 협상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 칸나는 제르만 왕국 내에서 신분도, 지켜줄 세력도, 가진 자산도, 아무것도 없는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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