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한숨을 내쉰 리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음이 여린 칸나는 분명 자신이 계획하는 방법을 반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온의 예상보다 그녀는 '사람' 이라는 존재를 아끼고 사랑했다.
제대로 된 자신의 편도 없이 외부에서 고립되어 생활했던 것이 비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도, 적대심도 낮았다.
'이것도 기억의 문제인가.. 아니면 타고난 건가..'
리온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수많은 반대에 부딪힐 거라는 예상이 들며,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어야 하는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은 어디까지인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되도록이면 잘해주고만 싶다는 중얼거림이, 정말 칸나를 위한 것보다 그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이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늙은 마녀를 상주시킬 수 없으니, 만났을 때에 여러 일을 진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오늘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왕비님께서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으신 듯한데..."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칸나는 아침을 먹은 뒤, 꼭 정원 산책을 했어. 나무나 꽃을 좋아하거든. 추운 겨울에도 거르지 않았던 일과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그는 자꾸만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들이 불편했다.
늙은 마녀가 오래된 마법이나 확실한 방법이라고 권해주었던 그 차의 마법을 칸나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은 그저 허언인가, 아니면...
"역시 그녀 때문인가..."
<마녀와 마녀 3.>
마주 앉은 칸나의 눈빛은 몹시 날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미모로 왕을 홀렸다던 이야기와는 상반되는 그녀의 싸늘한 표정과 눈초리가,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어본 늙은 마녀도 입을 열지 않고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런 때에 괜히 말이라도 잘못 꺼내봐야 불똥이 튈 테니 가만히 있는 게...'
"........."
칸나의 눈에 비친 늙은 마녀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흉터로 얼룩진 얼굴들은 오랜 세월을 수많은 풍파와 함께 견뎌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절룩거리는 다리, 손과 목에 보이는 화상 자국은 마녀 토벌이 있던 때에 잡혀와 고문을 받았던 증거처럼 보였다.
다만 그 모든 것에 상관없이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고, 흑마술을 사용한다기엔 중독이 나타나지 않은 모습이 조금은 칸나를 안심시켰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칸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방법을 리온에게 권한 건가요?"
늙은 마녀는 그녀의 질문이 저주 무기에 관한 것임을 되묻고, 이내 자신이 먼저 권한 방법은 아니었다고 답하려다 그만두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고는 입을 꾹 다문 늙은 마녀를 본 칸나는, 그녀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경계심을 낮추고 부드럽게 말을 바꿨다.
"이름은 뭐예요?"
"그건 왜..."
"리온은 늙은 마녀, 라고 부르던데.. 난 그렇게 부르기 싫어요. 알려주세요, 가명이어도 좋으니."
가짜 이름을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던 시대였지만, 마녀들은 흔히 가명을 쓰는 것을 알고 있었던 칸나의 배려였다.
"......기억은 없어도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계시네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다시 아까처럼 온화한 얼굴을 그녀를 바라보는 늙은 마녀는, 오래전부터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이젠 새삼 이름을 부르는 게 낯설지만 그래도 왕비님이 원하시니 알려드린다고 덧붙였다.
"이다 입니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난 칸나예요."
사람을 소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그만두라며 저주 무기에 관한 것을 반대하던 칸나는, 이다의 상념에 잠긴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먼저 해보세요. 듣겠습니다."
이다는 그녀에게 왕비님과 자신은 걸어온 길도 다르며, 걸어가야 할 길도 다르기에 감히 자비를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저는 전하의 힘이 되어드리고,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겁니다. 다만 그 방법이 누군가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왕비님께는 제가 화형에 처해도 마땅한 늙은 마녀로 보인대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마녀 토벌로 인한 처형이 있었지만 화형을 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그렇게 극단적인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그녀의 바람은 무엇일까.
".....다른 마녀들처럼 마법 기사단이 될 생각은 없다는 거군요? 나이 때문에 몸이 힘들다면 고문*이라도 괜찮은데.."
*고문(顧問) - 어떤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는 직책
아쉬워하는 칸나를 보며 이다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흑마술을 사용했다고 화를 내시더니, 어째서 저 같은 사람을 사용하려고 하십니까."
"누구나 기회는 받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칸나는 임신을 돕는 마법 차에 관한 것뿐 아니라, 흑마술, 마녀들의 가명까지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지식들은 늙은 마녀인 자신 못지않거나, 혹은 더 많아 보인다고 생각한 이다가 질문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나요?"
"?"
모친을 알고 있는 듯한 이다의 말에 꼿꼿했던 칸나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혹, 지오니를 만난 적이 있었냐며 몸을 살짝 숙이고 다가오는 그녀의 질문에 이다는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친구..였나요?"
친구라는 말에는 대답 없이, 그저 웃었다.
이다는 지오니가 뛰어난 마녀였으며, 칸나를 많이 사랑했고 지켜주고 싶어 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
잠시 지오니의 생각에 말이 없던 칸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갔다.
리온의 힘이 되어준다는 이다의 말이 왕권 강화를 의미하는 거라 생각한 그녀는, 긴급한 전쟁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위험한 방법은 허락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저주 무기를 개발하는 건 그만두세요."
"그저 개발만 하고 예비용으로 배치한 뒤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심하라며 상황을 넘기려 하는 이다의 말에 칸나가 어이없어하며 답했다.
"시험이 안된 무기는 부대에 배치되질 않습니다."
하...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리온이 가르쳐준 건 아닐 텐데.
늙은 마녀는 어설프게는 속여 넘길 수 없는 칸나를 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세요."
이다는 더 이상 재지 않고 직접적으로 묻는 칸나를 보며, 왕비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소원이라고 답을 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은 불로불사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뛰어난 마력을 지닌,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칸나라 해도 들어줄 수 없는 소원.
리온이 어떻게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지는 나중에 얼버무리면 된다는 얄팍한 눈속임.
이쯤에서 왕비님은 그만 빠져주시라는 경고와도 같은 말.
'저 여리고 순진한 왕비는 당황하겠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칸나는 당황하지도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코웃음을 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다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에토르 대륙의 신도 들어주지 않을 소원을, 한낱 인간에게 바란다..?"
칸나의 말을 들은 이다의 눈이 커졌다.
"거짓이라면 날 아주 얼뜨기로 본 것일 테고, 진심이라면 그 나이 먹도록 허상도 구분이 안될 만큼 멍청하다는 얘긴데..."
리온에게 들은 것과는 너무 다른 칸나의 모습.
그녀의 공격적이고 차가운 말투에 이다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칸나의 이런 모습은, 이미 삶의 수많은 상처와 고통으로 무뎌지고 닳아빠진 늙은 마녀의 마음에도 새로운 충격을 안겨줄 만큼 색달랐다.
아름다운 모습의 새 왕비.
누구의 예상보다 빠르게 기품과 예절, 지식을 익힌 새 왕비.
...였지만, 그녀는 한 떨기 꽃처럼 쉽게 바스러질 것 같은 여린 마음씨의 새 왕비는 아니었다.
그런 칸나를 보며 이다의 눈앞에는 자꾸 지오니의 모습이 겹쳤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은 감추어야 하나 보군요? 누군가 더 빠르게 들어줄 수 있다면, 그쪽을 이용해도 좋을텐데 굳이 감추려는 건..."
"정말 리온밖에 들어줄 수 없거나, 리온도 모르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
칸나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대충 얼버무리려 했던 것에 미안해진 이다가 얼른 말을 돌리며 새롭게 제안을 건넸다.
"왕비님, 저는 이만 일어나야 합니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세요."
여기저기 떠돈다면서.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찾아가라는 거야.
칸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하지만 당신은 제대로 된 답을 줄 것 같지 않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왕비님의 질문에 더 이상 거짓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하지요."
"...마녀의 약속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괜찮습니까? 제가 지금 계약으로 받겠다고 하면 곤란할 텐데요."
칸나의 말에 자리에 일어서던 이다가 멈칫했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바닥을 보는 이다의 고민이 깊었다.
이거 정말.. 모르는 게 없군.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해야 하나.
아니.. 아니지.
어차피 지금 이 모든 건 되돌리면 그뿐인 일들인 걸.
이다는 결심이 선 듯, 흔쾌히 답하며 안주머니에서 천조각을 꺼내 그 안에 든 말린 라벤더를 건넸다.
"받으십시오. 전 괜찮습니다."
"........."
헤어질 때를 아는 두 사람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칸나는 또 보자며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고, 이다는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서로 많은 생각이 오고 갔으나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다는 칸나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보았고, 칸나는 이다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후회와 상처를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이다와, 이용당하는 것뿐인 마녀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 칸나는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밤, 칸나는 이다가 건넨 라벤더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마법을 읊었다.
마법을 통해 빛을 얻은 라벤더는 다시 생명을 얻었고, 그녀는 생기를 되찾은 꽃을 화장대 위에 놓인 작은 빈 병에 꽂아두었다.
<에필로그>
792년 7월 20일.
검은 숲에 살던 마녀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이다' 라고 소개했다.
보름 전 태어난 칸나는, 그동안 여러 마녀들의 축복을 받았다.
이다는 칸나의 탄생을 축해해 주러 온 13번째 마녀였다.
그녀는 칸나가 아기들의 유행병에 걸리지 않도록 축복을 걸어주며 마나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목걸이가 칸나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늘도 밤늦게까지 파티가 이어졌다.
매일 지속되는 손님 접대가 힘들 법도 한데 항상 기쁨으로 응대해 주는 남편이 너무 고맙다.
마녀들로부터 쏟아지는 여러 가지 축복과 축하를 보며 당신도 예전에 이런 모습이었겠다고 웃는 그를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내가 만났던 13번째 마녀는 나에게 저주를 걸었지만, 칸나가 만난 13번째 마녀는 그 아이에게 축복을 해주었다.
이 차이점이 칸나의 삶을 절망과 고통이 아닌 행복으로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나처럼 긴 시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채 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피할 수 운명이 칸나의 삶을 거친 파도 위에 올려놓아도, 이 아이가 걷는 길은 반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