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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Feb 07. 2024

현대판 "나라야마 부시코", "플랜75"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흥행에 성공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城)"(2004)에는 '소피'라는 이름의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옵니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할머니로 변한 소피 역은 일본의 유명 배우 바이쇼 치에코가 맡았습니다.


바이쇼 치에코는 이 영화의 엔딩곡인 '세계의 약속'도 직접 불렀죠. 주제곡인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 목마'도 더할 나위없이 좋지만, 바이쇼 치에코의 연륜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듣는 '세계의 약속' 덕분에 이 영화의 마무리는 꽤 우아했습니다.

       



198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는 국내에서는 수상 후 16년이 지난 1999년에서야 개봉했습니다. 이른바 '4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일본 영화는 수입이 가능하다고 한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 덕분입니다.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 포스터


부모가 70세가 되면 마을 관습에 따라 자식이 부모를 지게에 지고 가서 나라야마산(山)에 갖다 버린다는 내용도 충격이었고, 아무리 산골이라 하더라도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으로 식욕과 성욕을 드러내는 전(前)근대 일본의 모습도 충격이었습니다.


일본 영화가 이런 문제작으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구나, 하고 알게 된 것도 조금은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영화는 "나라야마 부시코"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듬해인 1984년에야 처음으로 지난달 타계한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진출합니다)


다음 주 개봉하는 일본영화 "플랜75"는 "나라야마 부시코"의 현대판이요, '문명화(文明化)된 "나라야마 부시코"'라 할만 합니다. 이 영화 역시 재작년 75회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황금카메라상-특별 언급'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연이 바로 올해 83세가 된 바이쇼 치에코입니다.


영화 속 가상의 제도 '플랜75'는 일본 정부가 장려·실시하는 국가조력사 프로젝트입니다. '플랜75'를 신청한 노인은 75세가 되면 국가가 운영하는 조력사 시설에 들어가 인생의 최후를 맞게 됩니다.


국가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영화 도입부의 내레이션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한 급진적 사고를 가진 청년이 총으로 노인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며 말합니다.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끼치기 싫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은 국가를 위해 죽는 걸 긍지로 여겨왔다. 나의 이 용기있는 행동을 계기로 진솔하게 논의하고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영화 "플랜75"에서 독거 노인 미치를 연기하는 바이쇼 치에코 / 찬란


바이쇼 치에코가 연기하는 독거 노인 미치는 호텔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다 해고됩니다. 집은 철거되기 일보 직전인데 경제적 여유가 없어 다른 집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사회보장 제도에 기대지 않고 아직 일할 수 있다며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컴퓨터 사용도 익숙치 않은 노인에게 돌아오는 자리라고는 한밤 중 도로에서 경광봉을 들고 차량을 통제하는 일뿐입니다. 같이 호텔에서 일했던 친한 동료의 고독사를 지켜 본 미치는 결국 플랜75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는데…




일본의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29%에 이릅니다. (한국은 18.4%) 그런데 영화 "플랜75"에는 '후기(後期) 고령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감독이 만들어낸 조어(造語)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 용어는 지금 실제로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이라고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말했습니다.


"약 20년 전부터 일본 정부에서 약간 공식적으로 '후기 고령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75라는 숫자에서 딱 끊고 '당신들은 이제 정말 인생의 마지막의 마지막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요. 그래서 영화에서와 같은 제도가 생긴다면 아마도 그 기준이 75세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영화 개봉에 맞춰 내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 / 찬란


마포의 한 북카페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동안(童顔)의 하야카와 감독은 사람의 가치를 생산성이 있는지 없는지로 판단하는 풍조가 일본 내에서 굉장히 커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상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정해진 것에 순종하는 일본의 국민성을 반영한 "플랜75"를 통해 일본 사회에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플랜75"에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 제도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거나 특별히 저항하지 않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에서도 중년의 아들을 채근해 산에 죽으러 가려고 애쓰는 노모(老母)는 아들에게 말하죠. "규칙은 따르라고 있는 거다. 정에 휘둘려봤자 아무 쓸모없어."


하야카와 감독은 "플랜75"의 내용이 일본의 근(近)미래에 가깝냐, 아니면 현재에 가깝냐는 저의 질문에 "현재에 가깝다"고 분명하게 답했습니다. '플랜 75'라는 제도만 없을뿐 나머지 것들은 이미 일본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요즘 일본에서도 '코스트 퍼포먼스'(가성비), '타임 퍼포먼스'(시성비)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전했습니다.


영화 초반, 미치가 방문한 후기 고령자 단체 건강검진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플랜75'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옵니다.


"이런 데 오는 것도 눈치보이네. 오래 살려고 용쓰는 것 같잖아." 혈압을 재던 미치의 친구가 말합니다.

"그러게." 미치도 희미한 미소로 맞장구를 칩니다.


"당신의 마지막을 도와드립니다. 플랜75~"

검진소에서 흘러나오는 홍보 영상은 마치 개인의 (자살) '선택'을 국가가 도와준다는 식의 허울을 쓰고 있습니다. 국가는 사실상 '플랜75'가 개인의 선택지 중 하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나아가 그러한 선택이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분위기로 몰아갑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은 어디가나 '도와준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밥값 계산도 도와주고, 안내도 도와주고. 그건 자신들이 할 일인데 왜 그걸 손님의 일인양 넘기고 도와준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플랜75"는 2022년 개봉했던 프랑스 영화 "다 잘된 거야"와 한국 영화 "나를 죽여줘"처럼 철학적 테제로서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다룬 기존 조력사 영화와는 달리,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인간의 쓸모를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앞세운 국가 차원의 조력사를 다룹니다. 앞선 영화들과 달리, '플랜75' 프로그램에는 의사나 가족의 동의 또는 승낙이 필요없습니다.


영화에서는 '플랜75'제도 3년 시행 후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엔에 달한다면서 정부는 향후 10년에 걸쳐 대상 연령을 65세로 낮출 것을 검토 중이라는 뉴스가 흘러 나옵니다. 오는 2050년이면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층이 인구의 40%가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섬뜩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이쇼 치에코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출연했을 때가 63세였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에 나왔을 때가 78세였습니다. 그리고 "플랜75"가 한국에서 개봉하는 올해는 83세입니다.


"플랜75"는 내용이 내용인지라 바이쇼같은 노인 배우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야카와 감독은 '플랜75'같은 제도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 배우들도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쪼그라드는 출생률과 늘어가는 고령층, 또 이에 비례해 증가하는 노인 빈곤층, 각종 연금의 고갈, 세대 갈등 등 우리에게도 점점 심각해져 가는 고령화 사회의 이슈 속에서 한국은 개인과 사회가 어떤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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