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이야말로 할리우드의 ‘카이사르급’ 감독이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애플 컴퓨터 광고 ‘1984’를 만든 전설적 CF 감독이기도 하지만 《에이리언》,《블레이드 러너》,《델마와 루이스》,《글래디에이터》,《블랙호크다운》,《마션》등 SF와 역사, 액션, 전쟁 등 다양한 장르에서 레퍼런스급 영화를 만들어온 거장이다. (물론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다작을 하다보니 명작과 범작을 오가기는 한다)
그가 창조한 ‘에이리언’ 세계관의 최신작 제목이 《에이리언: 로물루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서로 붙어있는 우주정거장 이름이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리들리 스콧 감독은 로마를, 로마의 콜로세움을, 로마의 검투사를 스크린 위에 우뚝 세운《글래디에이터》의 감독으로 이름 높다.
지난 2000년 글로벌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했던《글래디에이터》의 속편《글래디에이터Ⅱ》가 개봉했다. 60대 중반이었던 감독은 이제 80대 후반에 이르렀고, 막시무스가 죽은 뒤 영화 속의 시간도 딱 그만큼 흘렀다. 《글래디에이터Ⅱ》는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와 콤모두스 황제(호아킨 피닉스)가 죽은 뒤 20여 년이 지난, 로마 제국의 21대 황제 카라칼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영국의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고대 로마 전문가인 메리 비어드의 베스트셀러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원제- ‘SPQR: A History of Ancient Rome’)도 바로 그 시점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모든 것은 로마에서 왔다.
‘현대의 제국’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는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다. 상원[Senate]이라는 말도 로마의 원로원[Senatus]에서 왔다. 파리의 개선문은 로마의 개선문을 본따서 만들었다.
달[月] 이름도 로마(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July], 그의 조카이자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딴 8월[August]이 나란히 그러하다. (원래는 라틴어로 8을 가리키는 october가 8월이었는데,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빨리 오르려고 두 달을 앞당기는 바람에 october가 10월이 되었다) 1년을 365일로 정한 것도 카이사르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지나다)라는 은유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그의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지방을 떠나 이탈리아 북쪽 국경을 상징하는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로 진군한 데서 비롯됐다.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나라의 영문 국호인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Republic of Korea)의 ‘Republic’도 ‘공적인 것’ 또는 ‘공무’를 뜻하는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공화국’이라는 의미로 쓴다. 공화국은 왕이 아니라 국민이 다스리는 나라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글래디에이터》1편에서 수레에 실려 로마로 압송되는 전직 “로마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스 군단의 군단장이었으며 진정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복”이었던, 그러나 현직은 노예 검투사인 막시무스의 찢어진 어깨 상처에는 하얀 구더기가 들끓고 그 상처 바로 아래에는 기호처럼 보이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맞다. 바로 메리 비어드의 책 제목과 같다. ‘SPQR’.
‘SPQR’은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뜻이다. 머리글자를 딴 말 가운데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약어로, ‘로마 공화정’을 상징하며 고대 로마에서 국호와 다름없이 쓰였다. 현재까지도 이탈리아 로마시의 맨홀 뚜껑과 쓰레기통 등에 표기돼있고, 프로축구리그 세리에A 팀인 AS로마(이 팀의 로고[紋章]가 바로 늑대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이다)가 2016-17시즌과 23-24시즌에 유니폼 앞면에 SPQR을 새기고 나온 바 있다.
《글래디에이터Ⅱ》는 1편에서 폭군 콤모두스 황제와 막시무스의 결투를 지켜봤던 어린 루시우스(폴 메스칼)가 로마를 떠나 아프리카 누미디아에서 장성했지만 결국엔 다시 전쟁 노예로 잡혀와 로마의 콜로세움에 서게 되는 이야기다.
전편이 만들어진지 어언 24년―. (1편이 개봉했던 2000년은《쥬라기 공원》과《매트릭스》가 나온 이후였지만,《반지의 제왕》과《아바타》는 선보이기 전이었다)
그동안 VFX에도 많은 발달이 있었던 만큼 서기 200년 경의 로마와 콜로세움 검투 시합의 모습이 훨씬 실감나게 그려진다. 코뿔소를 탄 검투사, 포악한 개코 원숭이와의 혈투, 콜롬세움을 대형 수조로 만든 해전 등은 전편보다 다채로운 “엔터테인먼트”(1편에서 검투 시합 관객을 향한 막시무스의 -영미권에서 밈이 된- 외침을 상기해보자)를 제공한다.
1편에서는 초반에라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로마 오현제(五賢帝) 시대 마지막 성군의 언행을 볼 수 있지만, 2편에서는 콤모두스와 맞먹는 폭군인 게타-카라칼라 공동 황제의 폭정과 패악질이 영화 내내 계속된다. 이들은 정사(政事)는 돌보지 않고 검투 시합에만 열을 올린다.
누미디아 원정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 온 아카시우스 장군(페드로 파스칼)은 이런 황제들의 모습이 못마땅하다. 황제가 승장(勝將)인 자신을 위해 검투 시합을 열어주겠다고 하자, 장군은 자기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을 위해 싸운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사양한다. (이 반응에 대해 황제는 칼을 집어 던지며 ‘격노'한다)
아카시우스 장군의 아내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인 루실라 공주( -유일하게 1편과 2편을 잇는 주연급 배우인- 코니 닐슨)도 황제의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사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글래디에이터’ 루시우스의 생모다. 루실라 공주와 아카시우스 장군은 원로원과 손잡고 반정(反正)을 꾀한다. (반정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루시우스가 “할아버지의 꿈, 원로원이 다스리는 로마, 희망의 로마”를 부르짖는 걸로 봐서는 공화정의 부활을 꿈꾸는 듯하다)
하지만 루시우스를 비롯한 노예 검투사들의 주인이자 야심가인 마크리누스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다.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원로원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둘 다 차지한 바 있는 댄젤 워싱턴은 마크리누스로 분(扮)해 이 영화의 후반부도 장악해간다.
마크리누스가 “투표로 할까요, 거수로 할까요?”라며 원로원 의원들을 겁박하는 장면, 황제의 환심을 사서 마침내 로마의 집정관에 오르는 장면 등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대 로마 최고위 관직이었던 집정관은 대대로 두 명이었고 임기도 1년에 불과했다.
그들은 한 쌍을 이루어 직책을 분담했다. 공화정 정부의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은 관직 보유는 언제나 한시적이어야 하고 단기간 한 사람이 통치권을 장악해야 하는 비상시를 제외하면 권력은 언제나 나누어야 했다.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158쪽
카라칼라 황제는 제2집정관에 마크리누스를 임명한다. 그렇다면 제1집정관에는 누구를 임명했을까? 원로원 의원들은 물론 마크리누스마저 경악하게도, 그것은 바로 황제 자신이 늘 데리고 다니는 애완 원숭이 돈두스이다.
영화적 허구지만 이는 명백히 로마 공화정에 대한 조롱이다. 기원전 44년 최초의 종신 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가 자신의 친구인 카니니우스 레빌리우스를 집정관에 앉혔던 것처럼. (역사상 최고의 웅변가로 일컬어지는 키케로는 이 일로 격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겁에 질린 원로원 의원들은 “돈두스 만세!”, “마크리누스 만세!”를 외칠뿐이다.
‘글래디에이터’ 1편이나 2편 모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허구다. 주인공 막시무스나 루시우스는 아예 실존 인물이 아니고 황제들이나 공주, 마크리누스(로마 최초의 비원로원 출신 황제였다) 같은 주요 실존 인물들도 실제 역사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서 이 글에서 일일이 짚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과 맥을 같이 하는 점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가 ‘볼만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생각해볼만한 엔터테인먼트’가 되기도 한다.
메리 비어드는『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고대 로마는 중요하다. 로마를 외면하는 일은 단순히 먼 과거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로마는 여전히 고급한 이론부터 저급한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2,000년의 시간이 지나서도 로마는 여전히 서양의 문화와 정치, 우리가 글을 쓰고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떠받치고 있다.
원로원 의원(Senator)도 아니고 공직자(Magistratus publici)도 아닌, 사인(私人)에 불과한 명씨와 ‘아우구스타’(Augusta) 등등이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작금(昨今)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인가. 공적인 언어와 관계로 처리돼야 마땅한 공적인 일(Res publica)에서 사적 언어와 관계, 조아림과 아부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은 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조롱당하고 있지 않은가.
사안마다 의견을 달리하는 보수 신문과 진보 신문들도 공히 몇 달째 공화정을 우려하고 있고,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도 줄을 잇고 있다. 그 중 가장 수사학적이라고 또는 키케로적이라고 -수사학은 로마에서 집대성되었다- 느낀 건 지난 13일 경희대 교수·연구자 226명의 선언문이었다.
(전략)
나는 매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며 공정의 최저선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고 듣는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공정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성실한 삶을 꾸려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 신뢰와 규범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규범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 유지의 첩경이라 말하지 못한다.
(중략)
나는 반성한다. 시민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나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나는 취약한 사람이다. 부족하고 결여가 있는 사람이다. 당신 역시 취약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취약하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를 낸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인류가 평화를 위해 함께 살아갈 지혜를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역사의 진실 앞에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모든 사람이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갖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