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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Dec 04. 2020

《야구소녀》주수인과 야구감독 염경엽

영화 '야구소녀'를 보고

이제부터 쓸 이야기의 첫머리는 영화 ⟪야구소녀⟫의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화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이에요. 영화는 고교 졸업반 야구선수 주수인이 천신만고 끝에 여성으로는 최초로 프로야구 선수가 되면서 끝납니다. 제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합니다. 좀 독특한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어요. 훗날 주수인은 프런트로 일해달라는 SK 단장의 첫 제안처럼 선수를 그만두고 구단 프런트 직원이 될 겁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이 영화의 광고 카피 "던져봐. 그 벽이 깨지도록!"처럼 벽을 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해 왔어요. 그 또한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화 ⟪야구소녀⟫는 판타지이자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한 고등학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자 선수 주수인은 고3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천재 야구선수로 화제를 뿌리며 입학했지만 갈수록 남자들과 체격과 체력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회전력 좋은 최고 구속 134km의 직구는 여자로서는 무시무시한 스피드지만 프로의 지명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스펙입니다. 프로팀 지명은 물건너갔고 트라이아웃*이라도 받아보고 싶지만 누구나 다 짐작할만한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는 물론 학교 코치까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고 살길을 찾으라"고 하지만 수인은 "해 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라며 훈련을 계속합니다. 보다 못한 코치가 수인의 엄마에게 "수인이 프로팀에 갈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본인이 안된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남이 안된다고 하면 안되는 거 아니냐"며 설득하고 SK구단 스카우트인 지인을 설득해 트라이아웃 기회를 얻어냅니다.


코치의 조언으로 패스트볼(직구)이 아닌 너클볼*을 연마한 수인은 트라이아웃에서 감독의 눈에 띄어 구단 단장으로부터 입단 제안을 받습니다. 단, 선수가 아닌 프런트 직원으로. 그러나 수인은 "나는 너클볼과 패스트볼로 타자 타이밍을 뺏는다. 시속 160km 빠른 공이 아니라 느린 공이라도 타자를 아웃시키는 게 중요하고 그게 내 장점"이라며 거절합니다. 단장은 얼마 후 계약금 6000만원의 2군 선수 계약서를 내밀며 영화는 '일단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주수인이 SK 프런트 제안을 거절할 때 저를 포함한 관객 대부분은 아마 "고졸 여성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에 실업자가 될 처지에서 프로야구 구단 직원이면 그게 어디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수인아, 넌 어느정도 네 꿈을 이룬거야. 받아들여"라고 속으로 외쳤을 겁니다. 하지만 수인은 선수가 아니면 관두겠다며 단장 방을 떠나죠. 저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수인보다는 오래 산 저로서는 "이제는 너도 할만큼 했으니 현실과 타협하고 행복해지렴"이라고 할 수도, "꿈을 이루기 위해 너도 부모님도 힘들겠지만 계속 도전해봐"라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꿈을 좇는 건 너무나 힘든 길이란 걸 압니다. 인생을 웬만큼 살아도 이런 고민은 계속됩니다. 본인의 일이든 자식의 일이든 잘 아는 친구의 일이든 조언하기가 너무 어렵죠.


영화를 보고 저는 올 시즌 경기 중에 실신하기까지 하고 결국은 감독직을 내려놔야했던 SK(이런 우연이!) 염경엽 감독이 떠올랐어요. 염 감독은 선수로서는 별볼일 없었습니다. 야구 명문인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나와 91년도 2차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태평양에 지명된 유망한 유격수였지만 통산 타율 0.195의 초라한 성적(KBO에서 150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 역대 최하위)으로 선수 생활을 마칩니다. 더 뛰고 싶었지만 "시즌 개막전 전광판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걸 보고는 화장실로 가서 펑펑 울었던" 염경엽은 프런트행을 받아들입니다. 현실과 타협한거죠.


수인과 다른 점이라면 본인도 인정했듯이 선수로서 죽을만큼 노력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심기일전, 부단한 노력과 어쩌면 프런트에 더 맞는 적성을 찾아 현대와 LG에서 운영팀장, 스카우트, 코치 등을 거쳐 은퇴 13년 만에 모든 야구인의 꿈이라는 프로야구팀 감독직에 오릅니다. 그 후 스토리는 잘 알려져있죠. 만년 하위팀 넥센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킨 '염갈량'. 프런트로서 치열하게 산 그는 능력자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감독과 단장으로서 승승장구했던 그도 올 시즌 큰 시련을 겼었습니다. 10연패, 8연패를 당한 SK의 성적 부진 스트레스로 경기 중 실신까지 해서 구급차에 실려갔고 치료를 받고 복귀했지만 결국은 감독직을 자진사퇴했을 정도로요. 야구인 염경엽의 대성공 뒤에는 아픔이 있고 행운도 있습니다. 염경엽이 계속 선수 생활하겠다고 고집했으면 지금의 그가 있을까요. 선수 염경엽은 너무나 아쉬웠겠지만 나쁘지 않은, 어쩌면 '현실적인' 훌륭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찬사를 받던 감독에서 꼴찌 경쟁을 하다 결국 물러났으니까요.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영화 ⟪야구소녀⟫가 특별히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105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수인이 묵직한 돌직구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대기 때문입니다. 꿈이냐 현실이냐,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지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 만의 전유물은 아니예요. 나름 사회생활을 오래한 고참이나 관리자에게도 충분히 의미있고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그 돌직구는 한편으로는 좀처럼 맞추기 어려운 너클볼 같기도 합니다. 너클볼은 공을 받는 포수도, 치는 타자도, 심지어 던지는 투수조차 공이 어디로 날아갈지 몰라요. 영화에서 수인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그런 너클볼을 컨트롤 해내려고 애쓰는 사람이 결국 투수입니다. 결국 이런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과정을 만들어가듯이 결과도 정해진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 결과는 인과법칙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돌연변이처럼 우연과 운에 기대는 부분 또한 크다고. 그러나 그런 우연조차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해 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 (사진은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야구소녀' 수인은 결국 1군에는 가지 못하겠지만 '깡다구'있고 선수 경력도 있는 좋은 프런트로 성장하리라고 봅니다. ⟪스토브리그⟫에 나오는 최초의 프로야구 여성 운영팀장 드림즈 이세영 이상으로요. "시속 160km를 던져야만 투수를 하는 건 아니다"라는 주수인의 말처럼 야구는 선수만 하는 게 아닙니다. 프런트도 있습니다. 선수든 프런트든 각자 역할을 다해 우승에 기여할 수 있어요. 그리고 주수인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도 있겠죠.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프런트에서 감독이 될 가능성이 전보다 커졌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주수인은 또 한번 역사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프로야구 최초의 여성 감독이라는. 그렇게 되면 남자의 3대 로망 직업이라는 영화감독, 함장, 프로야구 감독 중 또 하나의 벽이 깨집니다. 그리고 영화 막바지 카메오처럼 잠깐 등장했던 구단주는 주수인을 일단 2군 선수로 뛰게 한 뒤 프런트로 보내는 큰 그림을 그린, 앞날을 내다볼 줄 알았던 경영자로 기억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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