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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Sep 29. 2021

20세기형 인간 (2) 인간관계에 연연하는 인간

나를 가라앉게 하는 것도 끌어올리는 것도 결국은 인간


최근에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을 읽다가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사랑한다, 알지?" "알죠." 내가 말했다. "그게 문제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태준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버지와 영원한 결벌의 심사를 체험할 때 작가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이다. 종교에 빠져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 학대한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압축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이 문장에 시선이 머물렀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서른두 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한자 그대로 많이도 가라앉았고 또 많이도 떠올랐다. 나를 가라앉게 한 수많은 문제들은 곰곰이 따지고 보면 결국 '인간관계'로 귀결되었다. 가족이든 연애든 친구든 사회생활이든 나를 울게 만들고 몸서리치게 하는 것 모두가 인간과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중 대다수는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해서' 생긴 문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 그 자체때문이 아니라 사랑에서 파생되는 여러 부산물로 인한 문제겠지만. 당연히 성애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아주 폭넓은 의미로의 사랑이다. 우정과 연민을 모두 아우르는 감정으로서의 사랑.


감성적이고 충동적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나는 누군가를 너무 쉽게 이해하거나 용서했다. 이해를 하면 용서가 따라오곤 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용서하는 경우도 많았고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주고 생활 반경을 그어준 부모부터, 태어나는 순간 부모의 사랑을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오빠, 그리고 살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들. 너무 싫다고 몸서리를 치며 엉엉 울어놓고 다음날이 되면 또 슬그머니 '그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거나 '나 때문에 상대방도 상처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들에 또 괴로워지곤 했다.


어릴 때에는 그것이 내가 철이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의 범위가 나 자신의 정신적 성숙을 담보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인 쌀알 씨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릴 때 속으로 마구 욕을 했다가 돌아서면 다시 쌀알 씨를 연민했다. 아빠도 저러고 싶지 않을 텐데. 내일 술 깨고 나면 엄청나게 후회할 텐데. 주정 부리다 잠든 쌀알 씨에게 이불을 덮어줄 때, 그러면 나는 내가 철든 딸이라고 느꼈고 부모를 마음껏 미워하는 친구들을 보며 조금 부러워하기도, 또 '아직 어려서 그렇다'며 얕잡아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멀어지는 과정에서 따돌림을 당했었는데 그 일도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을 사귀면 된다고 생각했고 순간과 찰나에 드는 치욕스러움이나 모멸감은 잘 씹어서 넘기면 됐으니까.


자라면서도 수도 없이 많은 배신을 겪고 '못된 인간들'을 만났다. 학계에서 저명한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한 적도 있었고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의 피해자가 된 일도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잘 못 자고 소화가 안 되는 탓에 변기를 붙잡고 위액을 게워내며 보내야 했던 수많은 불면의 밤들.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고 절대 넘어올 수 없는 선을 마구 그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사람이 좋을까?


나에겐 누군가를 연민하는 일 혹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지키는 방어수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미워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대책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연민해버리는 것. 사실은 도덕적으로라도 우위에 서고 싶어서, 심정적으로라도 이기고 싶어서 상대를 받아준 일들이 많다. 나는 그런 식으로 가해자인 상대방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나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롯이 상대방을 위한 연민이나 애정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연민을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이상한 회피 성향이지만 그것으로 스스로를 잘 지켜냈다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일련의 큰 사건들이 나를 깊은 슬픔으로 가라앉게 하는 사건이었다면 작은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나를 넘어뜨리는 사건들도 많았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던진 악의 없는 농담, 울컥한 마음에 되받아치려는데 모두가 와하하 웃어버려 같이 웃어넘겨야 했던 장면. 그때 하려던 말들은 운동화 바닥에 깔린 모래알처럼 혀밑에서 버석거렸고 생각 없이 웃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면 귓가가 붉어졌다. 상대방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농담의 소재, 내 콤플렉스였는데.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인데 정작 그 일을 같이 겪은 친구는 기억도 못한다거나 내 생일엔 조용했던 단톡방이 다른 친구의 생일날은 시끄러워졌다거나. 그런 것들을 무심하게 훌훌 흘려보내는 성격은 되지 않으나 또 '내가 이런 일로 기분이 나쁘다'라고 이성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근사한 성격도 되지 못해서 혼자만 끙끙 앓고 뒤에서 흘겨보기도 했던 날들.


직접적으로 나를 넘어뜨리지 않아도 나를 그 자리에서 물끄러미 멈춰 서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겪으며 저열한 인간의 면모를 보았다. 나에게 다정하게 웃고 아르바이트생에겐 카드를 던지듯이 내미는 사람,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할머니를 향해 '그러게 노친네가 왜 밖에 나와서 난리야'라고 말하는 사람, 생존권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못 배워서 저렇다'라고 혀를 차는 사람.


그런데도, 정말 대체 왜, 나는 사람이 좋을까?


요즘들어 더더욱 많이 드는 소망이 있다. '선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다정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더라도 자상한 인간이고 싶다.' 그 소망을 이루려면 당연히 사람들과 부대낄 일이 많아야 하는데 사실 그 순간들을 몹시도 좋아하는 편이다. 실없는 농담을 하며 배가 찢어지도록 웃는 순간이 좋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농담에 사람들이 웃어대느라 높아진 목소리가 좋고 내가 정성 들여 한 음식을 한 입 먹고 동그래지는 눈이 좋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허정거리고 걸어 다니는 것도 좋고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사진을 찍는 것도 좋고 고장 난 레코드처럼 옛날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도 좋다. 내 말들이 위로가 되는 것도, 내 말에서 해답의 힌트를 얻는 것도 좋다. 사람을 오랫동안 못 만나면 나는 좀 시무룩해지고 만난 사람이 나와의 만남을 즐거워하지 않은 것 같으면 허우룩해진다.


그리고 고백하자면―그런 성향 때문에 살면서 다양한 종류의 배신을 했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버텼겠지만.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끊어낸 것이 내 입장에서야 '안 맞는 친구와의 결별'이었지만 그 친구 입장에서는 배신으로 느껴졌으리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을 놓아 보내고 떠나보내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혔다. 내가 상대방을 연민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 상대방에겐 죽기보다 싫은 동정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은연중에 던진 말 한마디에 운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장면들을 곱씹고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인간 군상의 저열함을 보여주는 표본이었을 수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서점에 가보면 인간관계나 처세술을 다루는 책들의 트렌드가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서 협상에 이르는 화술보다 상대방의 무례한 언행에 상처 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섹션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구체적이고 다정한 언어들로 형상화되어 있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서들이 범람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대한민국에도 개인주의가 웬만큼 뿌리내렸고 무엇보다 '사는 게 팍팍한'시대니까. 하루 온종일 먹고살기 위한 투쟁을 위해 에너지를 쏟고 왔는데 또 타인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타인에게 맞춰주느라 자신을 속일 기력이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타인에게 배신당하며 감정 소모를 하기에는 이미 내 자아는 살아남기 위해서 여기저기 소모당하고 있다. 게다가 현실에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은 넘쳐나고 인터넷 안에서는 가지각색의 '진상'들과 '소시오패스'들이 날뛰고 있다. 당연히,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기에 가장 좋은 세상인 것이다.


그 말들은 모두 옳다. 나도 나에게 무례한 언사를 하고 나를 비하하려는 사람을 위해 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런데 악의 없는 말과 표정에는 몇 번이고 기회를 주고 싶어 진다. 조금 피곤해도 약속 장소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고 싶고, 친구의 취향을 위해서라면 안 맞는 여행지도 따라다녀줄 수 있다. 우울해하는 친구를 위해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고, 실없는 농담에 맞장구 쳐주고 싶다. 나도 친구가 사준 한 끼의 식사로, 다정한 맞장구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적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나를 가라앉게 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결국 나를 고양하는 것도 인간이다.  대학교 때 처음 자취를 시작한 내가 신경 쓰여 자신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와준 친구, 내가 브런치 첫 글을 발행했을 때 이 순간이 너무 감동적이라고 말해준 친구, 그런 친구들이 나를 불안과 안일에서 끌어내 주기 위해 내밀어진 손들이다. 좋은 사람들 때문에 나도 좋은 사람이고 싶어 진다. 있는 힘껏 마음을 쓰고 또 있는 힘 껏의 마음을 받은 경험들이, 누군가가 내 무릎을 꺾이게 만들 때에 부드러운 쿠션이 되어준 것이다. 물론 그중엔 지금은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오해가 깊어져 돌이킬 수 없는 사이도. 누군가는 어차피 지금 곁에 남아있지도 않은 사람들인데 그때 당시에 그들에게 쓴 시간과 돈과 마음이 아까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나는 그때 많이 줬고 또 그만큼 많이 받았고 그것으로 다양한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를 스쳐간, 혹은 지나간 인간들 모두 내 안에 어떤 관계를 만들어놓고 갔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떠나가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의 자리가 생긴 것이리라.


얼마 전, 고등학교 1학년 수업을 할 때였다. 이태준의 달밤을 배우던 한 학생이 '선생님, 선생님 같으면 수건이가 포도 훔쳐왔을 때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했다. 소설 속 황수건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에게 참외 장사라도 해보라고 돈을 준 서술자에게 그 마음을 갚으려 남의 집 포도를 훔쳐왔다. 학생들에게 도둑질은 물론 나쁜 것이지만 왜 서술자가 황수건이 가져다준 포도를 '순정의 열매'라고 했을지 고민해보라고 생각거리를 던져둔 터였다. 그런데 답이 아니라 질문이 돌아온 것이다. 예상치 못한 역질문에 곰곰이 생각했다. 선생님 잡수라굽쇼, 그렇게 말하며 포도를 훔쳐 온 황수건의 마음. '음, 고맙고 아까워서 못 먹었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 학생, 내 대답을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 선생님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왜?'

'선생님 ENFP니까요.'

MBTI에 과몰입한 학생이 내려준 명쾌한 정의.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어버렸고 인터넷에서 하는 엉터리 심리 진단에서 정답을 찾았다. 그렇다. 나는 왜 그럼에도 인간이 좋을까? 아마 내 본질적인 성향이 그런가 보다. 그리고 그 학생 눈에는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표상하는 과일을 보면 고맙고 아까워서 못 먹을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그것도 자연히 웃음이 날 만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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