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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Sep 13. 2021

아빠의 3만 원이 나를 절망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내가 누군가의 전부라는 것을 안다

  

가난 :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함. 또는 그런 상태.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가난하게 살았다. 쌀 없어 밥 굶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넉넉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당연히 가난은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역설적으로 가난은 내 자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어릴 적, 시골에서 슈퍼를 했을 땐 가난을 알기에는 어렸던 데다 '슈퍼'라는 특성상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었다. 집도 따로 없이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 살았는데, 방 문을 열면 언제나 물건들이 질서 정연하게 준비되어있었으므로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11살, 슈퍼를 정리하고 경기도로 이사를 온 후에야 가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계란 하나 두부 하나도 돈을 주고 사야 했다. 바꿔 말하면,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더 문제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깡시골에서 살 때는 서로의 집이 잘 산다거나 가난하다거나 생각을 하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우리 집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집도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때 친구들이나 친척집들을 떠올려도, 그것이 설령 객관적인 의미의 '빈곤한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하다'라는 어감과 연결을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가난을 객관적으로 확인시켜줄 만한 준거집단이 없었다고나 해야 할까. 이사를 온 뒤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내 방'이 생긴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는데 같은 빌라에 사는 친구들은 이 빌라를 '창피한 빌라'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가 특히 그랬다. 이미 지은 지 오래인 빌라는 아파트에 비하면 창피한 것이었고 우리 집이 자가가 아닌 '전세'라면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절을 지나오며 내가 절절하게 느낀 가난은 단지 사고 싶은 것을 못 사는 것이나 당장 가진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이 주는 가장 큰 괴로움은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주말도 없이 출근을 했고 엄마 역시 구내식당에서 밥을 하고 공장도 다니고 그러다 빚을 내 가게까지 차리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엄마 아빠가 지친 얼굴로 퇴근하고 또 똑같이 지친 얼굴로 일어나 출근을 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 멀쩡한 신발을 두고 유행인 디자인의 신발을 사달라거나 몇백만 원 하는 컴퓨터를 사달라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다른 애들은 다 갖고 있는 것이든 뭐든 간에.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나 스스로가 철없이 느껴졌고 엄마 아빠에게 죄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집에서 자란 빨리 철든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 역시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지 않는 아이'로 컸다. 물건을 못 가진 설움보다 그걸 사달라고 말할 때의 죄책감, 갖게 될 때까지의 과정에서 겪을 후회, 혹은 결국 갖게 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설움과 실망감 이런 것들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또 어린애가 왜 그런 생각까지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엄마도 이런 거 다 못하고 컸는데 내가 해달라는 게 염치없다'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안다면 엄마는 아마 속상해서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고 며칠밤을 뒤척일 텐데. 오히려 엄마는 못해봤으니까 딸이라도 하길 바랐을 텐데. 그때의 엄마 아빠는 철든 딸이 예쁘다기보단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까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뭐든 엄마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지금의 내가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철든 거라고 생각했다.


후에 한 친구와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둘이 박수까지 치며 공감한 얘기는 '취향의 부재'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가방이나 신발을 내가 고른 적이 거의 없었다. 당시 백화점에서 일하던 사촌언니가 가져다주거나 물려주는 것에 의지했다. 닳거나 해질 때까지 매고 신고 다니다가 떨어질 때쯤 되면 또 귀신같이 언니가 물려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떤 친구가 나에게 '너는 대체 어떤 옷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악의 없는 순수한 호기심이 묻어있던 말투라고 기억한다. 언니가 물려준, 고등학생이 입을 법하지 않은 정장 느낌의 코트와, 또 언니가 가져다준 반대의 의미로 고등학생이 입을 법하지 않은 패딩을 번갈아 입는 나를 보고 정말로 내 취향이 궁금해서 물어봤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좀 당황했다. 어떤 옷을 좋아하냐니. 언니가 준 옷 중에 따뜻한 옷이지, 별 게 있나. '취향의 부재'란 그런 의미였다. 우리는 늘 무언가가 고장 나거나 찢어지거나, 여튼 물건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면 소비를 할 결심을 했고 그때의 소비 기준은 늘 두 가지였다.

가격과 내구성.

그러니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 리가 만무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당연하게도 브랜드나 메이커 옷에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그런 걸 잘 모르는 편이다. 돈을 벌게 되었는데도 그렇다. 아마 그때부터 나 스스로에게 세뇌한 '옷이 비싸 봐야 다 천이고 면인데' '신발이 비싸 봐야 다 깔창 있고 끈 있는 건데'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 '가격표에 0 하나만 없으면 샀을 텐데'는 지금도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강 쌀알 씨―내가 필명을 쓰듯 아버지에게도 가명을 지어줬다ㅡ안타까워했다. 나와 쌀알 씨는 마치 석가모니와 마하가섭처럼 말하지 않아도 염화미소, 이심전심, 네맘내맘으로 통하는 사이였다. 나는 용돈을 달라거나 무엇을 사달라고 하지 않았고 쌀알 씨는 내가 그런 말을 꺼내기 전에 비상금으로 용돈을 주거나 회사에서 나온 보너스 같은 것으로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을 사주었다. 그것도 나에게 사라고 하면 내가 안 산다고 난리를 치거나 혹은 골라도 최저가를 고를 걸 아니까 그냥 알아서 사 왔다. 쌀알 씨가 하이마트에서 열심히 골라온 민트색 미키마우스 MP3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물색없고 현실적인 오빠는 '이런 귀엽기만 하고 실용성이 없는 걸 왜 사 오냐 같은 가격의 다른 MP3로 당장 바꿔오라'라며 깽판을 쳤지만.

고3 때는 심지어 회사에서 무슨 얘길 듣고 왔는지 요즘 애들은 공부를 하려면 다 이런 게 있어야 한다면서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PMP를 사줬다. 나는 아마 아빠가 먼저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죽었다 깨나도 그 기십만원짜리 물건을 사달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고3 때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빠가 공부하라고 사준 거니까, 제값 하려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입생 때는 아빠가 회사에 반차를 내거나 핑계를 대고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학교 앞에서 1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며 역시나 여기저기서 이렇게 저렇게 모았을 용돈을 내 손에 쥐어주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늘 우리 사이엔 '엄마 몰래'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 엄마에게 받는 공식적인 생활비는 따로, 아빠에게 받는 용돈은 나 알아서 따로. 당연히 엄마는 다 알고 있었겠지만.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결국 퇴직을 하게 되었다. 아빠는 몇 년 된 중고차를 사서 이미 몇 년째 타는 중이었는데 그 차마저 팔아버리고 나온 지 10년은 된 중고차로 차를 바꿔 탔다. 당시에 엄마가 하던 치킨집도 여러모로 어려워지고 있었다. 동네에 네네치킨도 생겼고 2마리에 12000원짜리 초저가 치킨집까지 생겨서였다. 주말에 집에 가면 '평일 내내 집안이 우울함으로 가득 찼었겠구나, 내가 온다고 우울함을 급하게 환기시켰지만 장판 밑으로 가라앉은 우울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것이 느껴졌다. 반찬도 내가 온다고 급조한 티가 나는 반찬들이 보였다. 맨날 둘이 꽈리고추볶음이나 무생채를 먹었을 거면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소고기 장조림은 뭐랄까, 관객 5명짜리 연극에 전도연이 출연해있는 기분이랄까.

 

어느 날 엄마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등록금은 이미 학자금 대출을 받았으니까 등록금 얘기는 아니었다. 엄마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었다. 내 자취방 월세 얘기였다. 그때 나는 원룸 월세와 관리비로 31만 7천 원을 내고 있었다. 용돈을 받지 않고 월세만 받고 있었지만 그 31만 7천 원도 빚만 남은 부모님에겐 큰돈이었다. 우울해하고 슬퍼해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나는 바로 시급이 높은 아르바이트를 알아보았다. 단연 투입하는 노동력 대비 시급이 센 것은 학원이었다. 게다가 나는 국문과에 재학 중이어서 겨우 2학년인데도 국어 강사로 채용이 되었다.


주 4일, 하루에 4시간 정도를 일하고 한 달에 50만 원을 받았다. 월세 31만 7천 원, 아르바이트하러 왔다 갔다 하는 버스비, 전기세, 가스비. 내가 한 달에 쓸 수 있는 돈은 겨우 10만 원 남짓이었다. 하루를 삼각김밥 하나로 버틴 적도 많았다. 주말, 학교에서 집에 갈 때 시외버스를 타면 편하게 갈 수 있는데 시외버스는 버스비 가격 자체가 비싼 데다 시내버스와 환승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6000원을 아끼려고 지하철을 2번 갈아타고, 버스로 또 1번을 갈아탔다. 집에 예상치 못하게 엄마나 아빠의 친구분들이 있으면 '왜 하필 내가 오는 날 집에 손님들이 있냐'란 생각보다 먼저 예의 바른 인사가 튀어나갔다. 속물적인 자아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예의 바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다.

아 이모 오셨네요 네 저 주말이어서 잠깐 집에 왔어요 (집에 가실 때 용돈 주세요)

이런 마음의 소리를 인식하면 이렇게까지 형편없이 속물적인 내가 속상했다. 전공 수업으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신석정 선생님의 시 같은 걸 배울 땐 더 창피했다. 그랬지만 뭐, 겨우 스물하나의 세속적인 인간에겐 우연한 용돈 5만 원이면 밥이 10끼였으니까 그런 걸 깊게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그러다 그 해 겨울, 결국 관절염과 빚만 남긴 치킨가게도 접고 쌀알 씨는 건설현장에 나갔다. 엄마는 다시 공장에 다녔다. 그리고 퇴근 후에 둘이 부업을 했다. 부업의 종류는 무궁무진했다. 와이셔츠의 실밥 뜯기, 목욕탕에서 쓰는 수건걸이 만들기, 박스 접기 등등. 나는 차라리 우리가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았다면 계속 가난해도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방학, 친구들은 여행을 가는데 나는 알바를 했다. 왜 나에게만 이렇게 가난이 지독하냐고,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 생활비 대출 100만 원을 받아 그 100만 원을 엄마에게 보내주면서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전공 교수님이 대학원에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던 날은 엉엉 울었다. 나도 김승옥을 현덕을 이청준을 더 배우고 싶었지만 그럴 돈이 없었으니까. 더더욱 문제는 대학원에 가서 어찌어찌 산다고 하더라도 그 대학원에 투자하는 '시간'의 기회비용이 내겐 너무도 크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를 부모님에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자연스레 부모에게 숨기는 게 많아졌다.


아빠가 새벽부터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또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아빠는 아마 10년이 넘은 낡은 중고차를 끌고 나를 학교에 내려주는 일이 미안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도 쌀알 씨는 우리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봤자 5분도 안 되는 그 거리를 꼭 그 데려다주려고 했다. 다 큰 딸과 그렇게라도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아빠는 늘 버스에 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창 너머를 바라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억지로 딴청을 피우거나 버스 안을 둘러보는 체했다.





대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아빠와 버스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 멀리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신호를 받고 대기 중이었다. 이제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아빠가 갑자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언제 샀는지 다 낡고 쪼글쪼글하고 색이 바랜 지갑. 그 지갑 한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얇았다. 그리고 아빠가 그 지갑을 확 젖힌 순간, 나는 '서러움'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아빠의 지갑엔 1만 원짜리 2장과 5천 원짜리 1장, 1천 원짜리 5장이 있었다. 어떻게 딱 떨어지게 3만 원이었다. 아빠는 그 8장의 지폐를 모조리 꺼내 나에게 쥐어주었다. 심지어 그 돈들 역시 낡고 쭈글쭈글했다. 언제부터 거기에 들어있었길래.


"딸, 맛있는 거 사 먹어. 이것밖에 못 줘서 미안해."


아니라고,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이걸 다 주면 아빠의 얇은 지갑이 텅 비어버려서 어떡하냐는 물음도 뱉을 수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버스에 올라타 기사님 뒷자리에 앉았다. 아빠 쪽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지금 내 뒷모습이 아빠에게 너무 야멸차게 보이거나 실망감으로 보일까, 그런 걱정도 당시에는 못했다. 나는 버스가 지하철역에 도착하기까지, 그 30분을 내리 울었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악 다문 채. 물리적으로 마음이 아렸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명치와 심장 쪽이 욱신거렸다. 사람이 너무 마음이 아프면 정말로 물리적인 의미의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그때 절절히 알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꽤 오래 가난했다. 강사 일을 계속하면서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고, 월세도 계속 내야 했으니까. 어금니 한쪽이 졌을 땐 그 와중에 가장 싼 치과를 알아보느라 골머리를 앓았고 남의 돈으로 유럽 여행을 가는 말도 안 되는 행운으로 첫 해외여행을 가서도 겨우 엽서 몇 장 정도만 사 왔다. 아빠 엄마 선물은 좋은 것으로 해주고 싶었는데 이미 받은 상금에서 반은 엄마를 주고 반은 학자금을 갚느라 어쩔 수 없었다. 친한 언니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느라 한 주를 빠듯하게 살아야 하기도 했고 시간이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이 빠지는 척하면서 친구들의 여행에도 빠져야 했다. 시간과 돈을 저울질해야 하는 일은 끊임없었고 미래에 투자하는 일, 그러니까 운동이나 대학원이나 여행 같은 것은 다 나중 일이 되었다.


불행 : 행복하지 아니함


이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나는 오래 불행했다. 돈이 없으면 행복하기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니까. 때때로 아주 행복할 때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시간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또 체념하고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쓰였다. 스스로가 처절하다고 느껴질 때도 많았다. 엄마는 양쪽 어금니가 모두 없는 상태로 치과에 가지 않고 버텼고 엄마의 조카, 그러니까 나의 사촌언니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느라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아야 했다. 나는 내가 가난한 것은 견딜만했는데 가난한 엄마 아빠를 보는 건 너무 슬펐다. 얼른 돈을 벌고 많이 벌고 그런 욕심이 생긴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난으로 절망하지는 않았다.

돈은 나를 불행하게, 처절하게 만들 수는 있었으나 내 인생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나 스스로 견디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언제나 그 장면이 떠오른다. 아빠의 낡은 지갑, 쭈글쭈글한 지폐, 그리고 망설임 없이 종이 다발을 꺼내던 아빠의 야윈 손. 그리고 그 순간이 떠오르면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울고 있다. 나를 언제든지 울릴 수 있는, 내 기억에 영원히 박제되어있을 장면. 그 장면은 나에게 아빠의 가난한 삶, 그리고 그 가난을 대물림한 나의 삶을 감득하게 하면서 또 반대로 내가 그런 아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쌀알 씨는 나에게 가난을 물려주면서 또 다른 것도 쥐어줬다.


나는 내가 쌀알 씨의 전부라는 것을 안다.

쌀알 씨는 지갑에 든 지폐가 아니라 어디에 든 것이라도, 그게 무엇이라도 나에게 주고 싶을 것이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쌀알 씨는 통화 중 내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으면 시장에 가서 도라지를 사 온다. 내가 밥 두 그릇을 먹으면 쌀알 씨는 그날 저녁 내내 기분이 좋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를 망가뜨릴 수 없다. 그것이 혹여 뼈아픈 가난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본질을 훼손할 수는 없다. 내가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오래 비참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 내가 백석의 시에 마음 깊이 공감하고 신석정의 시에서 울림을 얻는 것, 그것은 모두 쌀알 씨 덕분이다.

나는 나의 목숨과 나의 행복이 삶의 전부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명치로 심장으로 알고 있다.



쌀알 씨는 서른둘이 된 딸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챙겨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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