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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품, 사라진 천국, 내가 다시 지은 천국

by 석은별

내게 세상은 처음부터 거칠고 낯선 풍경이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따뜻했던 장소. 그곳은 할머니의 품이었다.


할머니의 품 안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세계였다. 아침을 여는 쌀 씻는 소리, 정오 무렵 집안 가득 퍼지던 된장국의 냄새. 그 감각의 고요함 속에서 내 마음은 비로소 평화로웠다. 부엌에서 식기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마당에 물 주는 소리, 이웃집 개 짓는 소리, 시끄러운 뉴스 아저씨의 목소리. 그리고 할머니의 느리고 규칙적인 걸음.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견고한 리듬이었다. 그 리듬 안에서는 불안이 쉬었다.


그분의 손등에서 풍기는 갖가지 양념 냄새에 코를 묻으며 잠들던 날들, 세상은 그때만큼은 나를 배제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자주 말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별이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의 흔들림 없는 믿음 속에 존재하는 기분’을 알았다. 그 믿음은 내 생애 최초의 안전지대였으며,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나는 그 품 안에서 비로소 인간다운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천국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열 살이 끝나가던 겨울, 할머니의 늦잠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여행이 되었다. 나와 함께 잠들고 일어났던 그 방이 그렇게 차갑고 무섭게 느껴진 것은, 그분의 부재보다 홀로 남겨졌다는 뼈아픈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늘 아침 일찍 부산스러웠던 할머니가 가만히 내 옆에 누워 계셨다. 잠들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웃는 표정인데, 할머니의 익숙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그분의 몸에 손대기가 두렵게 느껴졌다. 언제나 품에 파고들어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이 멈추고, 온몸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죽음을 이렇게 생생하게 받아들여야 하다니. 어젯밤 잠들기 전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팍을 토닥여 주던 그분의 손 주름이 굳어 있었다.


장례식 날, 낯선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형님이 그렇게도 은별이, 은별이 하더니. 손녀가 눈에 밟혔을 텐데, 어찌 그리 가셨을꼬. 주무시듯 편안히 가셨으니 호상이라네. 이만한 복이 없지.”


‘호상(好喪)?’


아빠에게 그 뜻을 물었지만, 그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고모는 나를 밀쳐내며 울부짖었다. “내가 우리 엄마한테 해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맨날 너 걱정만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됐다. 무슨 호상이냐, 무슨 호상이야!”


곁에 있던 동네 언니가 조용히 알려주었다.

'잘 돌아가신 분에게 하는 말이래.'


"잘 돌아가신? 왜? 뭐가 잘 돌아가시는 건데?"


사람들에게는 죽는 것도 복이 있다고 했다. 아프지 않고 잠자듯 돌아가시는 것을 복 받았다고 한단다. 열 살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나 어른 되는 거 본다며? 나 대학 가고, 시집가서 아기 낳을 때도 같이 있어 준다며? 할머니는 죽는 게 그렇게 좋아? 나보다 좋은 건 없다며? 나를 두고 떠날 만큼 죽는게 그렇게 좋았던거야?”


할머니가 떠난 후, 나는 세상의 온도를 잃었다. 그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익숙함을 빼앗긴 자리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변화는 낯설고도 달갑지 않았다. 나는 모두에게 거칠어졌고, 심술을 부렸으며, 어떤 기대도 희망도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그때 나는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나도 할머니를 만나러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낯선 모든 것이 너무나 아프고 시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분의 손끝이 남긴 '리듬'을 조금씩 되찾았다.


이른 아침에 밥을 짓고, 빨래를 널고, 초저녁에 창문을 닫을 때면 문득 그분의 호흡이 내 몸에 따라온다. 그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그분의 품은 사라졌지만, 그 품이 가르쳐준 규칙적인 삶의 감각은 내 안의 살아있는 리듬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나에게 단지 사랑을 준 사람이 아니라, 이 거친 세상과 연결되는 평범함의 감각, 세상을 견디게 하는 질서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품을 찾는다. 다만 이제는 누군가의 품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분이 남긴 리듬을 따라, 내 안에 작은 천국을 스스로 축조하고 있다. 할머니의 품은 사라졌지만, 그 품이 가르쳐준 평범의 감각은 내 삶의 가장 단단한 기초가 되었다.


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그 느린 걸음과 규칙적인 온기를 물려줄 때. 나는 깨닫는다. 가장 평범한 리듬을 살아내는 이 순간이, 할머니가 내게 유산으로 남긴, 가장 단단하고 영원한 천국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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