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나는 언제나 웃고 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가를 조금 접어 “괜찮다” 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는 건 나에게 익숙한 훈련이었다. 웃는다는 건 ‘문제없음’의 신호였고, 그 표정 하나면 대부분의 상황은 무난히 지나갔다. 웃는 얼굴은 언제나 가장 안전한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단체 사진을 찍을 때면 뒷줄 오른쪽 끝 자리를 선호했다. 혹시라도 가운데에 서면 더 많이 웃어야 했다. 한 번의 찰칵이 끝난 후에도 나는 미소를 거두지 못했다. 사진이 끝났다는 걸 알아도 표정은 쉬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보통의 아이’로 보이기 위한 무의식적인 지연이었다.
웃음을 배운 건 학교에서였다. 친구들이 장난을 치며 웃을 때, 나는 타이밍을 맞춰 웃는 법을 익혔다. 웃음이 늦으면 분위기가 끊기고, 너무 빨리 웃으면 어색해졌다. 그 미묘한 타이밍을 맞추는 건 언어보다 어려운 기술이었다. 나는 그 기술을 열심히 연습했다. 웃음을 통해 ‘나도 너희와 같아’라는 신호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얼굴이 아파오고, 입술이 떨리고, 그때마다 속에서 이상한 피로가 밀려왔다. 내가 웃고 있는 이유를 모를 때가 많았다. 누군가의 농담에 진심으로 웃은 건지, 아니면 혼자만 어색하지 않으려는 방어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웃는 동안 항상 생각했다. “이게 맞나? 지금 웃는 게 옳은 걸까?”
그 의심은 웃음을 무너뜨렸고, 무너진 웃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나는 더 크게, 더 오래 웃어야 했다.
청소년 시절, 학교 졸업앨범을 펼쳐보면 나는 여전히 같은 표정이다. 약간의 기운, 억지로 들어 올린 입꼬리, 단정하지만 어딘가 낯선 눈빛. 사람들은 그런 사진을 보고 말한다. “웃음이 참 예쁘다.”
그 말이 내가 보이고 싶은 대로 보여져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그 웃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문제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 같았다.
어느 날, 앨범을 넘기다 문득 깨달았다. 사진 속의 나는 살아 있는 ‘나’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라는 역할이었다.
연애 시절, 남자친구가 공원에서 나를 몰래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 속의 나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웃지 않았는데도,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억지로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표정은 스스로 피어났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 이게 나의 얼굴이구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해서 나온 그 미소는 내가 세상과 맺는 또 다른 방식의 신호였다. 그건 ‘문제없음’의 표정이 아니라, ‘존재해도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 웃는 얼굴을 찍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증명사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존재를 등록했다. 진짜 감정 대신 표정으로. 그 표정은 사회적 통화였고, 그 통화로 나는 타인의 신뢰를 얻었다. “이 사람은 괜찮아 보인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나를 점점 비워갔다. 표정 하나로 불안을 가리고, 미소로 혼란을 눌러두다 보니 감정의 결이 얇아졌다. 누군가 진심으로 웃겨도 그 웃음이 얼굴을 통과하지 못했다. 내 감정은 언제나 ‘표현의 중간 단계’에서 멈췄다. 진심은 얼굴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정리되어버렸다.
나는 왜 그렇게 웃어야 했을까. 지금 돌아보면, 웃음은 ‘정상’의 가장 완벽한 가면이었다. 슬픔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분노는 관계를 깨뜨린다. 하지만 웃음은 모든 걸 봉합한다. 누구도 상처 입지 않게, 모든 것을 무난하게 만든다. 나는 그 무난함의 기술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것이다.
이제는 웃음이 무섭다. 때로는 누군가의 웃음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의 고통을 먼저 본다. 억지로 들어 올린 입꼬리, 눈빛에 남은 망설임, 그 미세한 흔들림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마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일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웃음이 거짓이더라도 그 속에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나는 웃음으로 버텼고, 웃음으로 세상 속에 들어갔다. 그 미소 덕분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웃음이 거짓이었다 해도 그건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사진 속 웃는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나의 가면이자 나의 증명서다. 누군가의 세상 속에 속하기 위해 내가 배운 첫 번째 언어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안다. 웃음 뒤의 침묵까지도 나의 표정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