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너랑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편해져.”
그 말은 언제나 칭찬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문장은 때로는 그리움을 떠올리게도 했다.
내가 할머니 곁에서 자유롭고 마음 편하게 지내던 그 시절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그 편안함은 나를 사랑해 준 할머니가 만들어 준 선물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법을 일찍 배웠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생존의 감각이었다.
눈치를 보고, 말의 결을 맞추고, 상대의 기분을 먼저 읽는 일.
이런 나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따뜻한 피난처였다.
“누가 우리 은별이를 눈치보게 하누... 이리와, 이리와. 할미 옆에 딱 붙어서 이거 먹어.”
그 말 한마디면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조금이라도 어른아이처럼 굴면 일부러 또래들과 놀도록 데려갔고,
어쩌다 떼쓰거나 고집을 피우면 “애가 그래야지, 암암 그래야지.”라며 웃어주셨다.
그 웃음 속에서 나는 ‘괜찮은 나’를 배웠다.
고모는 “애를 너무 기 살려놓으면 안 된다”고 혀를 찼지만,
할머니가 만들어 준 안전한 공간은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뿌리가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들의 불편함을 먼저 감지하고 부드럽게 완화시키는 능력이 생긴 것은.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편안함’의 근원을 잊었을 때, 그건 사랑받기 위한 기술로 변했다.
나는 늘 먼저 배려하고, 먼저 웃고, 먼저 사과했다.
그건 자연스러운 다정함이 아니라 두려움이 만든 다정함이었다.
‘싫다’는 말을 삼키며 “괜찮아요.”, “좋아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말들은 예의 바르지만, 내 마음을 지우는 주문 같았다.
결국 나는 늘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 속에서 점점 나를 잃었다.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 불렀다.
‘듣는 사람’, ‘따뜻한 사람’, ‘배려하는 사람’.
나는 그 이미지가 무너질까 두려워 괜찮은 척, 웃는 척을 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내게 기대었고, 나는 더 공허해졌다.
대학 시절,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넌 완벽하게 착한데, 가끔 무섭다.”
그 말은 내 마음을 찔렀다.
그가 본 건 내 안의 빈자리였다.
그제야 알았다.
사랑받는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는 공식’으로 살아왔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맞추며, 상대의 욕망을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공식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탁월했지만, 나를 소멸시키는 데에도 완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랑받고 싶은 걸까?’
그 질문이 나를 멈춰 세웠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존재해도 괜찮은 나’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있었다.
그건 타인이 채워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건 할머니가 내게 보여준 방식처럼, 이제는 내가 나를 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고 말해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기억을 되살리며 이제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은별아, 너는 오늘도 괜찮니?”
그 물음 하나로 나는 다시 살아난다.
이제 나는 사랑받는 공식을 버리고, 그 자리에 ‘사랑의 근원’을 되살리려 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보다 내 마음을 먼저 돌보고, 내 진심을 표현하려 한다.
그 과정이 서툴고 관계를 흔들더라도, 그 흔들림 속에서 진짜 관계가 자란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다. 다만 이제는 그 사랑이 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길 바란다.
할머니가 내게 남겨준 그 편안함처럼, 나 또한 나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려 한다.
그것이 내가 새로 발견한 ‘사랑받는 사람의 공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