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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무너지는 사람들의 특징

by 석은별

무너지는 소리는 대개 조용하다. 사람들은 박살나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붕괴는 잘 들리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일상은 여전히 잘 굴러간다. 약속을 지키고, 메일을 보내고, 식탁을 차리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 ‘잘’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조금씩 새어 나가고 있는 에너지의 흔적이 숨어 있다. 무너짐은 외부의 큰 충격보다, 내부의 작은 진동들로 인해 일어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늘 정리되어 있고, 말수가 적고, 표정이 단정한 사람들. 대화의 결을 읽고 타인의 리듬에 맞춰 호흡을 조절하는 사람들. 그들은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대신 하루에 한 번쯤, 불 꺼진 방 안에서 허공을 오래 바라본다. 눈물이 나진 않지만 가슴 한가운데에 무언가 축 늘어진 채로 매달려 있다. 그게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버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일상은 마치 잘 윤활된 기계처럼 돌아간다. 그러나 그 기계의 유지비는 생각보다 크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말투를 조절하고, 불편한 감정을 삼키며,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으로 하루를 지탱한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살아간다’는 이름의 노동이다. 겉보기에 문제없어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미세한 균열이 자라난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작은 금이 쌓여 결국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일도 아닌 일’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그 조짐은 생각보다 일찍 나타난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거나, 깊이 잠들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미 하루가 다 지나간 듯한 피로가 있다.
대화 중에 방금 들은 말을 잊고, 문득 하던 일을 멈춘 채 허공을 본다.
별일 아닌 일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사소한 일에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그런데도 “괜찮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꺼낸다.


이 ‘괜찮음’은 방어막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후의 장치. 하지만 동시에,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도록 자신을 감추는 가면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은 묻는다.
“그 사람, 왜 갑자기 그렇게 됐대?”
그러나 ‘갑자기’는 없었다. 다만 아무도 듣지 못했을 뿐이다. 균열의 미세한 소리는 너무 작아서, 당사자조차 놓친다.


나는 한때 그 조용한 붕괴의 중심에 있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내 안은 조금씩 텅 비어갔다. 작은 피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감정의 눌림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게 유지였다. 그러나 유지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나를 깎아내는 비용, 감각을 닫아두는 비용, 그리고 언젠가 폭발하지 않으려면 조금씩 자기를 희미하게 만드는 비용.


사람들은 ‘버티는 힘’을 칭찬하지만, 그건 때로 ‘자기 소거의 기술’을 말한다. 스스로를 덜어내며 균형을 맞추는 능력, 말하자면 ‘기능적 우울’의 생존법이다. 밖에서는 멀쩡히 작동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감흥도 남지 않는다. 그 무표정한 평온이 바로 붕괴의 예고편이다.


이런 사람들은 눈물보다 침묵으로 무너진다. 누가 위로하려 다가오면 더 단단해지고, 그 단단함 속에서 더 깊이 침잠한다. 그들의 마음은 늘 조용한 방 같다. 불빛은 있지만 온기는 없다. 그 방 안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잠에 든다. 다음 날 다시 일어나 평범한 얼굴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용한 사람’들을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 그들의 침착함은 아름다움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절규의 반대편일 수도 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어깨에는, 늘 보이지 않는 짐이 있다. 그 짐은 흔히 “괜찮다”는 말로 위장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큰 사건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언제나 사소함 속에 숨어 있다. 아무 일도 아닌 일들이 마음속에서 엉켜가며, 어느 날엔가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만든다. 조용한 무너짐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듣지 않을 뿐이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괜찮아 보이는 표면’이야말로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신호라는 것을.
누군가의 평온한 얼굴 뒤에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고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무너짐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균열의 리듬으로 우리 곁을 지나간다.
그 리듬을 들을 수 있다면, 이미 회복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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