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은 편안해야 하는데, 왜 내 안정은 이렇게 무겁지?
나는 평범을 지키느라 매일 조금씩 소진되고 있었다. 이상하거나 특별하지 않게 사는 법을 배우는 데 인생의 절반을 썼고, 그 평범을 유지하기 위해 남은 절반을 계속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침은 언제나 비슷했다. 정해진 시각에 딱 맞춰 사는 건 아니지만,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스케줄을 확인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외출을 준비한다. 가끔 여유가 생기면 근처 하천을 거닌다. 그럴 때면 잠시 이런 생각이 스친다.
‘아, 나도 이제 남들이 말하는 그 평범한 일상 안에 들어와 있구나.’
프리랜서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자유롭지만, 실제로는 흔들림 위에서 겨우 균형을 잡는 일에 가깝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나만의 루틴은 분명 나를 안정시켰다. 그런데 그 안정이 어느 순간 내 몸과 마음을 고정시키는 틀이 되어 있었다.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나는 ‘평범’을 붙잡고 버텼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는데, 그 안에서 나는 제자리를 지키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 정도면 괜찮은 거 맞지?”
그 말 속에는 안심과 의심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평범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남들을 관찰하고, 적당히 맞춰 웃고,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만 익히면 된다.
문제는 그 상태로 살아낸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먼저 지쳐간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지는 피로가 있다.
나는 늘 예의 바르고, 적당히 웃고, 무례하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감정의 폭을 줄였다.
프리랜서에게 일정은 곧 생계라, 업체가 갑자기 일정을 바꾸거나 취소하면 계획이 한꺼번에 흔들린다.
속으로는 당황하고 화가 나도, 겉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곤란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설득했다.
‘다들 이 정도는 겪으니까, 나만 유난 떨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감정을 접다 보니 어느 순간 ‘기분’이라는 감각 자체가 흐려졌다.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르겠는, 그냥 아무렇지 않은 상태.
그 무표정한 평온이 나의 기본값이 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
하지만 그 평온은, 이미 많이 지쳐 있는 마음이 만든 방어막이기도 했다.
평범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매일 정장을 입고 사는 일과 닮아 있었다. 조금 끼고 불편해도 단정해 보여야 하니까, 쉽게 벗을 수 없었다.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하루 종일 웃는 사람처럼, 나는 언제나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나 자신을 조여 왔다.
그 ‘괜찮음’에는 분명 대가가 있었다.
주말이 되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영화를 봐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을 들어도 예전처럼 가사가 가슴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해야 안심이 되고, 가만히 쉬면 오히려 불안해졌다.
루틴은 나를 보호하는 장치이자, 동시에 나를 묶어두는 끈이었다.
안정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서서히 질식시키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안정’을 원했던 걸까. 아니면 단지 ‘불안하지 않은 상태’만을 원했던 걸까.
불안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일상을 빽빽하게 채웠다. 할 일 목록을 만들고, 감정을 정리하고, 모든 일에 기준을 세워두었다. 예측 가능한 하루는 분명 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예측 가능함이 나를 점점 더 지치게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일정하고, 대부분의 반응이 계산되어 있으면 삶은 안전해진다. 그 대신 조금씩 쌓여가는 것은 ‘회복되지 않는 피로’였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 루틴은 처음부터 회복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통제를 위한 장치였다. 내가 너무 흔들려 보이지 않도록,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도록, 무너져 보이지 않게 나를 단단히 고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감정과 행동을 조정하며 살아가다 보니, 나는 매일 조금씩 나 자신과 멀어졌다. 감정의 여백이 없는 삶은 어느새 ‘살아 있음’이 아니라 ‘작동함’에 더 가까워졌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표현보다, 하루를 운영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날들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규칙적인 삶이 좋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리듬이라도 쉼표가 없으면 음악이 되지 않는다.
내 삶에는 쉼표가 없었다. 무계획한 시간,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 그런 틈을 나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금세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이래도 되나? 이렇게 쉬어도 괜찮은 걸까?’
그래서 나는 늘 무언가를 했다.
청소, 정리, 기록, 계획.
멈추는 대신, ‘정리’와 ‘관리’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일을 만들었다.
휴식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사실은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았고, 멈추는 법을 점점 잊어갔다.
그리고 결국,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먼저 쓰러진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려주었다.
어느 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가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특별히 한 일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온몸이 가벼웠다. 빈 시간이 불안만을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그날은 오히려 숨이 조금 더 깊어졌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그 단순한 사실이 나를 조금 울게 했다.
그동안 내가 붙잡고 있던 ‘평범’은 사실, ‘과로한 평온’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루틴의 틈 사이에 여백을 두려고 한다.
크게 변화를 주지 못하더라도, 하루에 한 번쯤은 무계획의 시간을 만든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10분, 음악을 듣다 가사를 흘려보내는 5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그 짧은 틈들이, 오히려 내 하루의 리듬을 살려준다.
안정은 조정과 통제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백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만들어낸 ‘평범’이 나를 지치게 했다면, 이제는 그 평범의 결을 다시 짜야 한다.
반듯한 선을 조금 비틀고, 완벽해 보이던 균형을 일부러 약간 흐트러뜨려 보는 것.
그 작은 일탈이야말로 진짜 회복의 시작일지 모른다.
이제야 알겠다. ‘평범의 피로’는 나를 잃어버린 채 평온을 흉내 낼 때 생긴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평범을 꿈꾼다. 하지만 예전처럼 남들과 같은 평범을 좇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덜 단정해도 괜찮고, 조금 어긋난 리듬으로 살아가도 괜찮다. 그 어긋남까지 품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에게도 자리가 생긴다.
그게, 나의 새로운 평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