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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른 리듬으로 살아도 괜찮다

by 석은별

예전엔 늘 조급했다. 요즘도 가끔 조급함이 올라오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어쩐지 남들보다 이미 늦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똑같은 일을 해도 속도가 다르면 실패 같았고, 남들이 이룬 시점을 기준으로 내 인생을 평가했다.
시간은 늘 나보다 먼저 달려갔고,
나는 그 뒤를 헐떡이며 쫓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도착감이 없었다.
저 멀리 어렴풋한 깃발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가까워질수록 다시 멀어지는 풍경만 반복되었다.


세상은 ‘빠름’을 칭찬한다.
빨리 적응하고, 빨리 해결하고, 빨리 성장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환호받는다.


한때 나도 그런 속도를 부러워했다.
특히 옆자리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선배와 함께 일할 때 그 감정은 더 짙어졌다.
응급실에서 일했던 습관이 몸에 배었다는 그녀는 결혼 후 행정으로 옮겨와도 여전히 ‘빠름과 정확성’의 화신처럼 보였다.


상사가 요청한 자료를 나는 ‘나름 빠르게’ 준비했지만 그녀의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자판기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녀가 칭찬받는 순간마다 나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따라오는 평가는 늘 같았다.
“샘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생각 많은 것이 그녀에게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사무실 전체가 돌아가는 속도에 비해 내 사고의 흐름은 늘 회의적이고 신중했다. 그 신중함이 ‘방해물’처럼 여겨졌을 때, 나는 나의 속도를 더 깊이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많은 생각’은 상담사로서의 본업에서는 오히려 나를 살렸다.
섬세하게 타인을 따라갈 수 있고, 말과 감정 사이의 작은 틈도 놓치지 않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아주 조용한 공간에서만 빛난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무실 사람들과의 온도 차는 결국 나 혼자 감내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다 연말, 사무실이 조금씩 고요해지는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세상 모든 생명에는 저마다의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꽃은 제때 피고, 나무는 제 속도로 자란다.
누군가는 봄에 피고, 누군가는 늦여름에야 피어난다.
나는 그 단순한 원리를 잊고 살았다.


남들과의 속도 차이를 인정하지 못했던 건
느림이 무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빨리 해야 인정받고, 많이 해야 사랑받는 세상에서 ‘천천히’는 늘 변명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내 속도를 숨겼다.
호흡을 억지로 빠르게 조정하고, 머릿속의 여백을 줄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살수록 내 안의 음악은 어지러워졌다.
삶의 리듬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정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나는 늘 시계의 박자를 따라 살았다.
일정을 맞추고, 목표를 세우고, 계획대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시계가 내게 맞지 않기 시작했다.
머리는 “지금 해야 한다”고 외칠 때, 마음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속삭였다.
그 간극이 커질수록 나는 자책했다.

‘왜 이렇게 느려? 다들 하는데 너는 왜 아직이야?’


그 자책이 쌓일수록 내 삶의 리듬은 죄책감의 박자에 맞춰졌다.

그러다 어느 날, 자연을 보며 깨달았다. 파도는 밀려오고, 바람은 불어가지만, 아무것도 뒤처지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자기 타이밍대로 움직인다. 늦게 오는 바람도, 일찍 피는 꽃도,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제야 나는 내 속도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결정을 내릴 때 오래 고민하고,감정을 소화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예전엔 이런 느림을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느림 덕분에 나는 사람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볼 수 있었고, 작은 변화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느림은 결핍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남들과 다른 리듬으로 산다는 건 다른 시간대에 사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의 아침이 내게는 밤일 수 있고,내 오후가 누군가에게는 새벽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같은 시각에 있지 않아도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표로 살아가지만 결국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른 사람의 속도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박자가 나보다 빠른 건 그들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 박자대로 걷는다. 하루가 조금 늦게 시작돼도, 대화가 잠시 끊겨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나답게 흐르고 있는가’이지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가’가 아니다.


가끔은 여전히 조급함이 올라온다. 그럴 때면 의식적으로 호흡을 늦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 안의 시계를 잠시 멈춘다. 그 순간 들려오는 건 내 심장 소리뿐이다.
그게 바로 나의 리듬이다.
아무도 대신 맞춰줄 수 없고, 대신 느껴줄 수 없는 고유한 박자.


이제 나는 믿는다.
남들과 다른 리듬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빨리 가는 길보다, 나답게 걷는 길이 더 멀리 데려다준다.


삶의 진짜 안정은 균일한 속도가 아니라 ‘나와의 조화’에서 온다.
그리고 그 조화는 언제나 느림 속에서 피어난다.


세상은 여전히 속도를 자랑하지만 나는 나의 리듬으로 하루를 연주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평범함의 가장 진실한 형태인지 모른다.
내게 맞는 박자로, 내 템포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나의 평범이고, 나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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