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공항에 왔다. 한두 시간 뒤면 제주도에 도착해 2주간의 휴가를 보내게 될 참이었다. 평일 저녁의 청주공항은 한적했다. 국내선 탑승 게이트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모바일 체크인을 하며 생각했다. ‘나 지금 제주도 왜 가냐’
나는 여행을 떠나기 앞서 명확한 의미를 갖춰놓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여지까지 내게 여행이란 곧 마침표였다. 수능 후, 전역 후, 이별 후, 졸업 후, 퇴사 후. 굵직한 인생의 한 시기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행을 갔다. 그러나 이번 휴가는 다르다. 그냥 어쩌다 보니 짬이 났고, 마침 비행기 표 값도 싸길래 떠나는 휴가였다. 그러나 이건 이유를 표면적으로 둘러대는 너스레는 될 수 있어도 진짜 동기는 아니다. 짬이 난다고 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제주도에 가야 한다는 법도 없거니와, 비행기표야 찾아보면 언제나 싼 날이 있기 마련이니까. 별 이유도 없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공항에 있다는 사실이 마냥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보안검색대에 배낭을 통과시키듯 내 머리통을 통과시켜 이 여행이 단순한 충동소비인지, 아니면 이전의 여행들처럼 마침표인지,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끝나기라도 한 것인지 속 시원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게이트 안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다들 어떤 확실한 의미를 갖고 이 평일 저녁에 비행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게이트 안쪽의 카페에서 파는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를 사러 갔다.
탑승 게이트에서 커피나 빵 따위를 사 먹는 것은 내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이 의식이 필요한 이유는, 탑승 게이트에서 나는 언제나 설렘보단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모든 게 제자리에 있을까? 친구들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동안 너무 오래 논 나머지 바보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무언가를 사 먹는 건 이런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카드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아 드는 건 사회적으로, 식도로 음식물을 넘길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니까. 커피를 한 잔 사 먹을 정도의 돈을 버는 한 절대 투명인간이 되는 일 따윈 없다고 되뇌면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약간 서글프기도 하다.
고맙게도 나의 실존을 보장해 주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 기분을 느끼려고 휴가를 가는지도 몰라’ 요즘 나는 일상에서도 종종 탑승게이트에서 출발을 앞두고 느끼는 불안-이름을 붙인다면 ‘투명인간 포비아’-을 겪는다. ‘투명인간 포비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의 형태로 찾아온다 : 회사에 속해있지 않은 반백수 프리랜서는 얼마나 잊히기 쉬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려 회사를 나왔는데 회사를 나오고 나서는 왜 ‘이대로 괜찮은가?’만 고민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꼭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무릎 통증 같다.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지만 어쩌다 용을 쓰고 난 다음날엔 몹시도 쑤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무기력을 맛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제 더 이상 젊지만은 않는구나’라는 씁쓸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도. 어쩌면 이 통증은 진즉에 임계치를 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무의식 중에 어떤 면역체계를 발동시켜 만사 제쳐두고 병원에 가는 심정으로 휴가를 떠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공항의 정돈된 차가움이 병원 대기실의 그것과 겹쳐 보인다. 여기가 병원이라면 커피를 사는 행동은 환자를 어르고 달래는 심리치료일 것이다. 커피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자 보세요, 커피를 살 수 있죠. 당신은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탑승 게이트에서 커피를 살 수 있으니 일상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커피를 살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투명인간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탑승게이트에서의 두려움은 쉽게 극복되는 막연함 두려움일 뿐이지만, 직업세계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도통 극복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그러나 극복하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한 실체가 있는 두려움으로 둘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기꺼이 혼동하고, 거기에서 순간의 위안을 얻는 것은 심리치료의 오래된 메커니즘이다.
나의 무의식이 결제한 첫 번째 심리치료 프로그램은 막바지-커피를 거의 다 마셔간다는 얘기다.-이건만 아직 비행기 도착시간까지는 꽤 남아있어서 숙소를 미리 찾아보기로 했다. 숙소를 고르는 것은 언제나 휴가의 성질을 규정짓는 일이다. 나는 두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이와 즐거운 긴장감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혼자 쓰기 아까운 호텔방에서 조금 궁상맞긴 하지만 편안하게 고독을 즐길 것인가.
여태까지 나는 신나게 게스트하우스를 고르는 타입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선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낯선 누군가와 "언제까지 여행하세요?"로 시작되는 뻔한 대화를 이어 갈 것을 생각하니 금세 피로해졌다. 새벽에 조심조심 공용욕실을 사용하는 것도 귀찮고. 무엇보다도 코로나가 무서웠다. 코로나보다 코로나에 걸려서 멈추게 되는 게 무서웠다. 일상을 멈추고 휴가를 떠나온 마당에 멈추는 것이 두렵다는 게 좀 말이 안 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의로 멈추는 것과 타의로 멈춰지는 것은 다르니까.
멈춤. 멈춤에 대해 생각하다 깨달았다. 이거야말로 내가 두려움의 실체임을. 아닌 게 아니라 나의 모든 두려움은 ‘멈추면 어떡하지’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수익이 멈추면 어떡하지. 커리어가 멈추면 어떡하지. 성장이 멈추면 어떡하지. 인생이 멈추면 어떡하지. 새로 진단해낸 ‘멈춤 포비아’는 앞의 ‘투명인간 포비아’보다 좀 더 근원적으로 느껴졌다. ‘투명인간 포비아’가 증상이라면 ‘멈춤 포비아’는 병명이다. '투명인간 포비아'는 커피 한잔으로 쉽게 진통시킬 수 있지만 '멈춤 포비아'엔 약이 없다. 젊으면 그나마 좀 낫다. 몇 년 전엔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나긋나긋한 에세이 덕을 좀 봤으니까. 하지만 요즘엔 약발보다 부작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말 멈췄을 때 감수해야 하는 위험부담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는 플라세보 효과조차도 기대할 수 없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엔 다들 오래 살고 또 정정하기도 해서,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아팠는지가 노인을 정의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 논리대로라면, 성인이 되어 성인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성인병이 성인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나는 멈춤포비아도 성인병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도 멈춤 포비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깨끗하게 정돈된 호텔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냥 깨끗하게 정돈된 호텔에 가기로 했다. 로비도 으리으리하고, 통창도 있고 욕심 포함 면적이 10평 정도 되는, 4성급 호텔이었다. 게다가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호텔의 1인실은 게스트하우스의 4인실보다 고작 7000원이 더 비쌀 뿐이었다. 아무래도 제주도에선 만남의 가능성이 숙박의 편안함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저 입원의 최소 비용이 높게 책정되어있는 것일 뿐인지도. 무엇이든 간에 내겐 가능성에 딸려오는 긴장감을 즐길 수 있는 젊고 건강한 마음이 없다. 내 마음은 정돈된 하얀색 침구를 보며 긴장을 풀어야 한다. 나는 멈춤 포비아 환자니까.
호텔 예약을 마치고 나니 몹시 피곤했지만, 할 일을 마쳤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은 산뜻해졌다. 공항 게이트에서 심리치료도 받고 병실도 예약해뒀는데 아직 아직 탑승시간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았다. 불편한 공항 의자에 기대어 이번 휴가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2주는 꽤 긴 시간이니까 호텔에서 좀 쉬고 난 다음 새로운 모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발은 크록스 밖에 안 가져가지만 백록담을 보러 한라산을 오르겠다고 객기를 부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낯선 누군가와 맥주를 마시며 밤바다를 산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새로 사귄 친구와 시장에서 파는 한 접시 만 원짜리 모둠회를 나눠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바이크를 빌려서 해안도로를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을 거절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프리랜서지만 ‘아 제가 지금 제주도에 와 있어서요..’라는 조심스러운 자랑으로 거절의 말을 전하는 객기를 부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상에 빠져있는데 별안간 안내방송이 귀에 꽂힌다. “00항공에서 마지막 손님을 찾습니다. 000님. 000님.“ 내 이름이었다.
나를 마중 나온 직원과 같이 공항을 달리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을 헷갈려서요...” 나는 항상 차표에 인쇄된 20분과 50분을 헷갈려했다. 정각이거나 30분이라면 헷갈리지 않았을 텐데, 차 시간은 왜 언제나 20분 아니면 50분인 걸까? 정시에서 살짝 모자란 이 시간들은 항상 나를 멍청한 공상으로 내몬다. 저 거대한 비행기를 기다리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지만 승무원들은 친절한 미소로 나를 환영해 줄 뿐이었다. 나는 그 자애로움에 감동한 채로, 제주도에 가면 어떤 허튼 짓거리도 하지 않고 얌전히 요양이나 하겠다고 다짐하며 거대한 앰뷸런스로 이어진 튜브를 통과했다. 짧은 비행을 마치고 나면 공항 입구에 심어진 몇 그루의 야자수가 남국의 정취를 자아내는 나의 요양원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자리에 앉아 이륙의 떨림을 전해오는 기체를 느끼며 이제 중요한 문제는 제주도에서 푹 쉬고 잘 돌아오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휴가는 마침표일까, 행갈이일까. 마침표라면 이번이 내가 쓰는 마지막 문장이 될 것 같다는 재수 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행기에서라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추락의 이미지일 뿐이라고 되뇌며 마음을 추슬렀다. 비행기 실내등이 꺼졌다. 제주도에서 뭘 하든 간에 먼 훗날엔 이 행갈이가 절묘했노라고 회상할 수 있길 바라는, 자포자기도 희망도 아닌 마음으로 나도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