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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상한새벽 Oct 05. 2020

#1. 흠집난 인간

퇴사, 띄어 쓰고 이직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모르는 번호인 걸 보니 내가 이력서를 제출한 헤드헌터 중 한 명일 것 같았다.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오픈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고, 그간 서류를 주고받은 사람 수만 해도 못해도 열 명이 넘었다. 가장 마지막에 제출한 곳이겠거니 대충 짐작하면서 사회생활 모드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처음 통화하는 사람을 향한 거라고 생각하기엔 거칠었다.


"저기요 대리님, 시간이 많이 늦어서 나중에 할까 하다가 제가 너무 황당해서 전화했어요."


예의상 하는 인사말 하나 없이 대뜸 날아온 게 이 말이었다. 순간 최근에 내가 받아놓고 까먹은 일이 있었나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 누구보다 충실한 백수 생활을 살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본인도 실수했다 싶었는지 한 발 늦게 자기소개를 덧붙였다(내가 생각한 대로 맨 마지막에 이력서를 제출한 회사 담당 헤드헌터였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본인의 용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는데, 요약하자면 내 이력서가 자기가 이제까지 받았던 '일반적인 마케팅 이력서'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흥분에 겨워 말을 쏟아내는 그 목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그가 보낸 잡 포지션 오퍼 메일을 다시 열어 읽어 보았다.


포지션 이름은 디지털 마케팅 전문가. 요즘 디지털이라 하면 보통 퍼포먼스 마케터 위주로 많이들 찾던데 내 이력서를 잘못 읽은 거 아닌가? 하고 처음엔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경력의 대부분은 브랜딩이나 IMC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 딱 한 줄 더 붙어 있는 전혀 상세하지 않은 상세 JD에 온/오프라인 마케팅 기획, 운영이라 쓰여 있었다. 그럼 퍼포먼스 마케터보다는 IMC 쪽에 가까운데 디지털 채널 위주로 캠페인을 진행하려나보다 짐작하고, 대충 ATL, BTL 위주 경력들로 정리해서 메일 전송을 눌렀다. 그러고 나서 두 시간이 채 안된 시점에 문제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너무 광고, 유튜브 위주 일이잖아요?"


이쯤 되니 나도 점점 황당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제 주요 경력이었으니까요."


분명 내가 구직 사이트에 올려 둔 이력서를 읽고 JD(직무요건)를 보냈을 테고, 거기서 크게 변한 내용이 없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문제인 거지. 사실 황당하기로는 그 성의 없는 JD만큼 할까 싶은데.


"그렇게 확실한 요건이 있으셨다면 적어도 JD에 참고할만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게 맞지 않나요?"


내 말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비춘 것도 잠시 화제를 다시 내 이력서로 돌릴 필요를 느낀 건지 급기야는 이력서 문장 하나하나를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다. 각 문장마다 개인적인 소감까지 이야기하면서. 만화에나 나올법한, 러브레터를 중간에 가로채서 반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을 것 같은 캐릭터가 현실에 정말 존재하는구나.


결국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보내신 이력서를 좀 더 수정하면 좋겠어요'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고? 사실 이력서를 수정하는 건 큰일도 아니고, 피드백이 있는 편이 그 회사에 맞는 서류를 준비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나에겐 이득이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이 사람의 태도가 너무나도 괘씸했다.


그동안 별 말없이 넘어간 다른 헤드헌터들은 무엇이며, 그 이력서로 면접의 기회를 준 회사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헤드헌터가 보기에 황당할 정도면 이 회사에 지원해봤자 어차피 좋은 결과가 있지 못한다는 건데 굳이? 그리고 혹시나 잘된다 하더라도 그 성공보수를 이 헤드헌터가 받는 건데 굳이?? 이력서를 보내기 전 직무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내 경력과는 접점이 별로 없는 포지션인 거 같다며 지원 철회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보내줄 인성의 사람이 못되었다.


"공백기간이 길다는 건 마이너스신 거 아시죠?"


네, 알다마다요.


"경력에 이미 흠집 나신 거니까요."


다다음날 잡혀 있던 면접 때문에 안 그래도 곤두서 있던 신경이 더 이상은 이 무례한 인간의 통화를 참지 못하겠다고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면접 준비 때문에 바쁘니 수정된 버전의 이력서는 주말 전까지는 기다려 줘야 한다고 말하고 일단 통화를 마쳤다. 끊고 보니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귀가 뜨끈뜨끈한 것이 핸드폰 열 때문인지 내 머리에서 뻗친 화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쉼 없이 오는 코로나 재난 알림 문자 사이로 이질적인 문자 하나가 끼어 들어왔다. 전날 나와 긴 통화를 했던 헤드헌터로부터 온 문자였다. 내용은 인사팀에게 처음에 보낸 버전의 이력서를 보냈다는 게 다였다. 내 이력서는 일단 보험용으로 내고 더 적극 추천할 사람을 찾기로 했나 보다 하고 더 이상 신경 쓰기를 그만뒀다. 어차피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게 유일한 에피소드였다면 나는 이 글을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퇴사와 이직 사이, 회사 밖에서 만난 인연들 중에는 유독 매운맛 인간들이 많았다.


미리 고백하자면 이 글은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며 이력서 한 줄 한 줄 잘 다듬다 못해 포트폴리오 프로필 사진까지 완벽하게 갖춘 뒤 성공적인 이직을 한 모범적인 커리어 개발에 대한 것이 못된다. 경력에 2년에 가까운 공백이 생긴 퇴사자이자 구직자인 나의 현재 진행형 무용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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