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카운트다운, 1980
스코어보다 삽입곡에 방점을 찍은 모 방송 프로그램의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음악]과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AFI(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최고의 필름 스코어 리스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공통점 하나가 눈에 띈다.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90년대의 영화음악에 비해 80년대의 작품군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는 것. 왜일까? 화려한 황금기(Golden Age)를 보내고, 은시대(Silver Age)로 접어든 영화음악은 70년대 중반 두 가지 변화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80년대가 시작되면서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는다. 하나는 반젤리스Vangelis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 같은 뮤지션들이 선보인 신시사이저 스코어가 차츰 각광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삽입곡으로 중무장한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이다.
새로운 빛이 있으면 새로운 그늘도 있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음악에 많은 비용을 들이기 어려웠던 젊은 영화학도를 신선한 사운드와 가성비로 매료시킨 전자음악, 그리고 기성세대에 반기를 든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대표작 <이지 라이더Easy Rider> 같은 영화에서 시도했던 선곡이 80년대엔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욱 상업적인 성격을 띤다. 영화음악의 경제성을 고려한 제작자의 입김이 감독보다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전자가 영화음악의 제작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였다면, 후자는 귀에 익숙한 곡으로 채운 컴필레이션 앨범 판매를 통해 부수적인 수입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80년대는 금이나 은에 비유됐던 이전과 달리 틴셀(Tinsel: 크리스마스 장식용 반짝이 실) 또는 플라스틱에 은유되는 시절로 불리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무장르의 장르인 영화음악이 BGM 혹은 OST라는 알쏭달쏭한 축약어로 미미하게나마 국내에 유입된 80년대, 배경음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키보드음이나 즉흥적으로 삽입한 팝과 가요를 '진짜' 영화음악으로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시대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중견 영화음악가가 된 한스 짐머나 대니 엘프먼이 풋풋한 신예로 등장했던 80년대 말까지, 10년 안팎의 짧은 암흑기 사이에 기억할만한 영화음악이 없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 시기를 장식하는 다수의 스코어가 존 윌리엄스, 제리 골드스미스, 엘머 번스타인, 존 배리, 엔니오 모리꼬네 등 은시대부터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연장선임을 기억한다면, 세대를 이어 80년대를 대표할만한 영화음악가는 손가락에 겨우 꼽힌다. 올해 여든다섯이 된 존 스코트John Scott를 그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음악을 만들며 70년대 영국을 무대로 활동했지만, 50세에 할리우드와 처음 인연을 맺은 이 노장 음악가는 지금까지도 할리우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수장이자 예술 감독으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 <최후의 카운트다운The Final Countdown>은 그의 할리우드 데뷔작.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그리고 그해 아카데미 음악상을 차지한 <페임>의 명성에 가려져 별로 빛을 보지 못한 수작이다.
취역 이래 베일에 싸여있던 세계 최대의 핵추진 항공모함 USS 니미츠. 미 해군의 전폭적인 협조로 거대한 군함을 카메라에 담은 <최후의 카운트다운>은 그 위용에 어울리는 힘찬 팡파르로 포문을 연다. 금관악기가 쏟아내는 박력 넘치는 선율과 스네어 드럼의 절도 있는 리듬을 깔고. '영화음악의 모리스 라벨'로 불리는 존 스코트의 뚜렷하면서도 고전적인 멜로디 라인, 그의 전매특허랄 수 있는 파워풀한 매력이 메인타이틀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마초스러운 <초인 헌터욜>, 크리스토퍼 램버트 버전의 타잔을 만날 수 있는 <그레이스토크> 그리고 리메이크보다 더 재미있는 원작으로 기억될 <맨 온 파이어>와 함께 추억의 80년대를 수놓은 존 스코트 표 남자의 음악이다. 경찰 관악대로 근무했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워, 영국 군악대에 소속된 청소년 밴드로 활동을 시작한 그의 이력이 얼마간 작용했으리라.
운 좋게 할리우드에 입성했지만, 사실 존 스코트는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감독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오로지 시나리오만 읽고 스코어를 작곡했다. 메가폰을 잡은 돈 테일러Don Taylor가 영화음악에 통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 대신 정작 그와 호흡을 맞춘 스탭은 편집 기사였던 로버트 램버트Robert Lambert. 영화사에 이 미지의 영국 작곡가를 추천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음악 콘셉트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지시 사항 없이 스코어를 작곡하는 것은 감독과 오랫동안 유대관계를 맺은 베테랑 영화음악가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으나, 오히려 <최후의 카운트다운>에서 존 스코트가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창작의 자유였던 셈이다. 하지만 작곡가에게 허용된 뜻밖의 자유도 그가 실력과 노련함을 갖추지 못했다면, 좋은 결과물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터. 과거로 타임슬립한 최신예 항공모함이 역사에 휘말린다는 비현실적인 영화의 긴장감은 상상력에 박진감을 더한 그의 음률에 탄력을 받아 짜릿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항공모함이 영화의 배경이자 실질적인 주인공이니 만큼 음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지사. 메인타이틀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거대 군함의 면면이 'The USS Nimitz On Route'에 속속들이 그려진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수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정찰 임무를 맡은 전투기가 이륙을 준비한다. 금관악기 대신 현악기로 날렵하게 편곡된 준수한 메인 테마가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를 가른다. 작은 실수도 허용할 수 없기에 긴장스러운 표정으로 비행기를 지켜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각잡힌 밀리터리 스코어처럼 예리하다.
이윽고 순항 중인 함선을 덮치는 기이한 폭풍.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지의 위험을 감지한 'The Approaching Storm'이 불길한 단음계로 조바꿈한 테마곡으로 위기감을 잔뜩 고조시킨다. 하나의 테마를 전천후로 활용하는 음악가의 기지가 번뜩인다. 우직하지만 둔탁하지 않달까. 그 뒤를 바로 잇는 'Into The Time Warp'는 또 어떻고. 시간의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병사들의 혼돈과 고통. 그를 묘사하기 위해 존 스코트는 따로따로 녹음한 오카리나와 현악기 소리를 제각기 다시 늘리거나 줄인 속도로 재녹음해 왜곡된 시간이라는 모호한 이미지를 음향 겸 음악으로 형상화시킨다. B급 영화의 냄새를 살짝 풍기는 영화에 신시사이저의 인공적인 음색으로 리얼리티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전위적인 음악으로 난제를 해결한다. 90년대 액션 스코어에 영감을 줄만한 신비로운 사운드로.
남자의 음악을 구사하는 존 스코트지만, 의외로 그가 선호하는 악기 중 하나는 플루트다. 이 영화의 러브 테마인 'Laurel And Owen'은 그 증표 같은 곡.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앞둔 1941년으로 간 오웬 중령은 상원의원의 비서인 로렐을 만난다. 가공할 항공모함의 위력으로 비극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남자와 영문도 모르는 채 홀로 살아남은 여자. 두 사람의 애처로운 속내를 한데 그러모은 선율엔 애수가 깊게 배어있다. 그리고 그 멜랑콜리한 선율은 작은 반전 같은 결말에 깔린 'Mr. And Mrs. Tideman'에 다시 등장한다. 좀 더 힘차고 강렬한 멜로디로. 영화의 초반 희미한 실루엣만 살짝 비쳤던 미스터리한 노부부가 미처 귀환하지 못한 오웬, 그리고 그와 결혼한 로렐이었음을 밝히면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 곡이 표절과 도용이 공공연했던 80년대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숨은 사례라는 점. 1981년 일본 TBS에서 제작한 <화요 서스펜스 극장(火曜サスペンス劇場)>의 주제가로 사용된 이와사키 히로미(岩崎宏美)의 '성모들의 자장가(聖母たちのララバイ)'가 바로 이 러브 테마를 표절했기 때문이다. 수개월에 걸쳐 일본 가요 차트를 휩쓸었던 이 노래는 존 스코트의 항의를 받고 뒤늦게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으나, 정작 그에게 돌아간 건 별로 없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때까지 이 곡이 받은 모든 음악상 수상자 명단에서 그를 제외시켰던 것. 당시 일본법에 따라 최고 200달러밖에 되지 않는 벌금을 제시하면서. 역설적으로 이를 계기로 존 스코트는 일본에 제법 팬을 갖게 됐지만, 동시에 일본으로서는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게 됐다. 빛과 그늘이 공존했던 시대의 영화음악으로.
01 [03:54] The Final Countdown - Main Title
02 [02:25] Mr. Tideman
03 [03:29] The USS Nimitz On Route
04 [04:23] The Approaching Storm
05 [02:46] Pursued By The Storm
06 [03:58] Into The Time Warp
07 [02:16] Rig The Barricades
08 [02:13] Last Known Position
09 [01:01] An Hour Ago
10 [00:46] December 7, 1941
11 [00:36] The Japanese Navy
12 [02:14] Shake Up The Zeros
13 [01:07] Splash Two
14 [02:23] Laurel And Owen
15 [02:11] Climb Mount Nitaka
16 [00:40] On The Beach
17 [01:48] General Quarters
18 [01:00] Operation Pearl Harbor
19 [03:28] The Storm Reappears
20 [03:41] Back Through The Time Warp
21 [01:27] The Planes Return
22 [01:30] The Admirals Arrive
23 [04:20] Mr. And Mrs. Tide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