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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두 밤을 지내고 나서야 나는 시차적응에 실패한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래 걸어 다닌 탓에 피곤한 줄 알았는데 늦은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고, 낮에는 스멀스멀 몰려오는 졸음은 확실히 그 증거였다. 어차피 새해 첫날이기 때문에 쉬는 곳이 더 많을 테니까, 오늘은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숙소와 가까운 곳을 조금 구경하고 카페에 가서 어제 산 책을 읽는 것.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 까지도 지독하게 현실감을 잃은 채였는지, 아니면 너무 현실에 갇혀있었던 것인지 결론적으로는 전에 없이 지쳐있던 나는 큰 마음을 먹고 빼곡한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부터 나는 그런 과거의 나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반드시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실내화를 사야 했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집이 아니라 호텔이니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는 것은 괜찮았다. 일회용 슬리퍼가 없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러나 샤워를 마치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것만큼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온종일 밖을 누비고 다녔던 신발을 신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깨끗이 씻고는 다시 그 신발을 신고 침대까지 걸어가는 일이라니.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한국인은 어쩔 수 없다며 실내에서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미드 장면마다 불편해하는 밈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운동화'를 신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가까운 곳에 자주(JAJU)가 있었다. 조금 더 ‘미국’ 스러운 가게에 가고 싶었으나 나는 조금 급했고, 다른 선택권은 없어 보였다.
어김없이 밖은 추웠고, 한산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상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오기 직전에 들었던, 사실 내가 꽤나 좋아했던 수업의 교수님께서 직장인 시절 발령을 받아 갔었던 겨울의 유럽에서 바빴던 탓에 냉장고를 채워 놓지 못해서 새해 연휴 내내 상사에게 신세를 져야만 했다던 이야기를 떠올렸던 나는 으레 미국도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도착한 자주 매장은 생각보다 컸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제법 달랐다. 식기류나 의류 구경을 왕왕하던 도중, 오늘 아침 나오면서도 아쉽게 바라만 봤던 ‘그 요구르트’가 생각난 덕분에, 나무 숟가락을 하나 골라 들었다. 그리고는 한 종류뿐인 실내화 코너 앞에서 한참이고 스몰 사이즈를 찾아 뒤적거렸다.
뿅뿅거리며 코인을 먹는 그 캐릭터 '마리오'가 신을 것 같이 생긴 동글동글한 천 실내화였는데, 색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나는 사이즈를 찾기 위해 색을 막론하고 있는 대로 실내화들을 끄집어냈다, 집어넣었다를 반복 해댔다. 십 분쯤 지나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싶은 마음도 들고, 포기할 때쯤에서야 드디어 스몰 사이즈를 찾아냈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하루 여행을 다녀본 결과 메고 다닐 크기의 가방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쇼핑백과 무늬 없는 에코백 가격이 같다는 직원의 설명에 냉큼 에코백도 하나 구매해 버렸다.
드디어 운동화를 현관 앞에 벗어둔 채로 방에서 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신나는 마음으로 근처의 카페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줄이 제법 길게 늘어져 있었기에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문득문득 들리는 한국어에 한국 여행객사이에서 유명한 카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어딜 가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셔서 한국에서도 인스타감성 카페를 찾아다니는 의미를 늘 희석시켜 버리지만, 그것마저 낭만이라고 스스로 합리화시켰다.
커피를 받고 힘겹게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 책을 읽었다. 제법 큰 카페였는데도 휴일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어제 갔었던 카페에서는 진동벨을 줬기 때문에 이름을 묻는 카페는 여기가 처음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영어이름을 불러줄 생각이었으나 왠지 당황하여 'Jane...?(제인...?)'이라고 엉겁결에 말해버렸는데 주문을 받는 직원도, 이름을 부르고 커피를 받아가는 내 얼굴을 본 직원도 어딘지 좀 어리둥절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그 이름은 '기묘한 이야기'를 사랑하는 내 너드스러움이 반영된 결과인 듯했다. 어쨌거나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다가 몇 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참 책을 읽다 보니 배가 좀 고파왔는데, 이 광활하게 북적이고 있는 카페에 내 짐을 얼마큼 방치해도 되는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옴짝달싹 않고 커피만 마시다 나왔다.
오늘의 첫 식사 메뉴는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다. 숙소 근처에 유명한 음식점이 있다는 걸 잠들지 못했던 지난밤 동안 찾아내었고, 나는 가득 찬 식당의 바 테이블에 간신히 앉아 마파두부를 먹고, 수돗물을 마시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1인손님이었던 덕이었다. 호출벨이 없는 식당에서의 주문과 계산은 정말이지 엄청난 참을성을 요구로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에게 와준 서버가 연신 퍼붓는 질문세례에 어질어질 해 진 나는 팁의 가격을 골라주지도 않고 식당을 나설 뻔했다. 팁도 없이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손님이 될 뻔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조용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법 웃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방인이 될 여행객이란 자리는 나에게 실수에 대한 압박감을 말끔히 지워준 것 같았다.
얼핏 긴 하루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아직 세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전리품처럼 들고 들어온 실내화를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침대로 들어갔다.
영화 속에서 배경음악이 웅웅거리듯, 보지도 않으면서 틀어둔 유튜브와 얇은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도 몽롱한 기분에 잠겨 이렇게 제멋대로 하루를 보낸 적이 언제였더라-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잠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좋게 들어오는 옅은 햇빛과 따사롭게 나오는 히터 바람. 정말로 오랜만에 죄책 감 없이 꿈꾸는 만큼 잠에 파묻혔다.
나는 잠자는 것을 썩 잘하는 성격은 아니다. 성격과 연관된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명절마다 끄집어내 지고는 하는 추억회상더미들 속에서도 밤만 되면 칭얼대었던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잊혀지지도 않고 그 악명을 드높이고 있으므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고등학생임을 감안하더라도 학교가 멀었던 탓에 늘 물리적으로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3년의 생활을 마무리짓고는 얼마간 하루 온종일을 잠에 푹 담가진 사람처럼 지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잠드는 데엔 대게 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긴 수면시간은 너무 쉽게 불쾌한 죄책감을 유발했다. 삶을 열심히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그러나 뜬눈으로 배회하던 수많은 어둑했던 시간들 또한 그러했다. 어떤 때에는 밤이 너무 길어서, 새벽이면 찾아오는 그 감성 들과 함께 휩쓸려오는 추상적인 단어들의 더미가 나를 짓누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이 머나먼 타국에서의 오롯한 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시차적응으로 인한 귀찮음보다는 반가움에 가까웠다.
스스로가 각별히 무언가가 결핍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수많은 눈동자들 속에 유기되어 있는 결핍들은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나 자신의 것조차 가늠할 수 없는데, 타인의것과 비교하는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다만 내가 그동안 놓쳤던 수많은 것들은 무엇일까. 이런 내가 되기 위해 내가 져버린 선택지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나아간 지금의 내가 얻은 것은 과연 내가 원한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낯선 대륙에서 그 답을 얻고 돌아갈 수 있을까.
뉴욕에서 맞이한 나의 새해 첫날은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혼자였고, 수많은 생각의 나열들과 드넓은 바다 위를 그저 부유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으나 그런 나를 오롯이 돌아볼 수 있는 하루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