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내 불쏘시개가 된 어느 개인주의 엄마의 변(辯)
아직 나는 잠식된 채 버둥거리고 있다. 하루 일과 중 내게 허락된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고갈된 것이 어찌 육체적 에너지뿐이겠는가. 빼앗긴 정신 에너지는 영혼까지 탈탈 털려 내게 주어진 쪽 시간에는 정작 나를 위해 쓸 의욕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냥 아무런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내 생체 에너지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여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란 걸.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여자가 내 시간과 공간을 통으로 할애해도 모자랄 엄마라는 역할을 해내는 중인 것이다. 세상 가장 이타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자. 이 얼마나 맞지 않는 옷인가. 현명함의 시작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한다. 지피(知彼) 보다 중요한 것이 지기(知己) 임을 갈수록 알겠다. 그럼에도 한 아이를 세상에 소환했다는 이 막대한 책임감은 나를 온통 지배해 정신차릴 틈도 주지 않는다. 모성애라는 그럴듯하고 위대한 단어와는 애당초 어울리지 않았으니 애써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무한하게 나를 누르는 이 책임감이 사실 가장 크고 솔직한 마음이다. 하여 순간순간 찾아오는 기쁨과 행복은 쉽게 휘발되고 묵직한 책임감만 어깨에 남아 현실을 무겁게 한다. 결국 이 상황은 내 생체 에너지가 너에게로 이동하는 중인 거다. 내 젊음이 너에게로 가 너의 젊음이 더 빛날 수 있게 기꺼이 불쏘시개가 되는 것. 알면서도 어느 이기적인 불쏘시개는 자아가 줄어들질 않아 여전히 타들어 가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것이 지금, 겨울방학과 봄방학을 보내고 있는 나의 심리상태이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이후 방학은 줄곧 나의 노화를 가속시키는 주범이었다. 그래서 방학이 끝날쯤엔 부실한 몸 여기저기 탈이 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양방, 한방 돌아다니며 부실한 몸뚱이를 재확인하는 중이다. 나이는 더 들었고 해가 갈수록 불쏘시개 화력은 줄어드는데 갈길은 아직 멀었다. 실제로 아들 키우는 엄마는 수명이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데 갈수록 그 신빙성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늘도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감당하다 지쳐 소리치는 걸로 억지로 셔터문을 내렸다. 우아한 마무리는 오늘도 틀렸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거실에 캐리어 2개가 나를 기다린다. 우리 집에 사는 전형적인 인식형 P께서 날로 시들어가는 아내와 방학 내 엄마와 씨름한 아들을 위한답시고 갑자기 2박 3일 여행을 들이밀었다. 매번 무계획적으로 밀고 들어와 땅부터 파고 보는 저 날림 공사 포클레인 아저씨. 캐리어에 한 명씩 담아서 문 밖에 내놓고 싶다. 짐을 싸는 것도 푸는 것도 내 일이거니와 쌍두마차 P와 2박 3일을 보내야 하는 J는 벌써부터 피곤이 엄습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에 목말랐던 나는 결국 또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설키는 길로 나서게 생겼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현실에 던져져 산산이 부서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매만지기 바쁘다. 제발 반박자만 빨라지자고 계속 채근했지만 현실은 항상 예상 밖이라 따라잡기 힘들다. 그렇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감도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도 아닌 가벼움, 즉흥성, 융통성일지도 모르겠다. 거실에 캐리어만 덜렁 꺼내두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말하는 저 '괜찮아 맨'이 괜히 내 옆에 있는 게 아니겠지. 그래, 눈 딱 감고 오늘 저 캐리어를 내버려두리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에 맡길 테니 이 여행이 끝나면 겨울도 방학도 나의 침잠도 제발 끝이 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