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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Jan 03. 2021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뚜스레스쥬르스와 복스웨이건


실로폰에 S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 오스트레일리아에 O가 없다는 공포. Foxbagain인 줄 았는데 Volkswagen 인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홍길동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게 tous les jours를 뚜스레스쥬르스로 부를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반발심. 발음하는 대로 생겼겠거니 하며 보이는 대로 짐작하게 하는 뚝배기 같은 오류를 겪는다.


성공한 줄 알았어.. 뒤집어 보기 전까지는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처음 마주한 사람 앞에서 돌팔이 관상가가 된다. 숱한 경험으로 내 안목이 구리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망각의 동물 아니랄까 봐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앞면은 봐줄 만 하나 뒤집으면 발암 물질을 구워놓은 비주얼인 나의 크로플 처럼, 첫인상만으로 비호감이라 단정 지어버린 그 혹은 그녀가 사실은 마더 테레사의 인품을 가졌을지도, 스티브 잡스를 뛰어넘을 잠재력이 내재된 차기 10대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지도, 수많은 영수증 사이에 구겨져 있는 긁지 않은 복권일지도 모른다는 걸 안다. 돌팔이 관상가의 통밥으로 뚝배기 보다 장맛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뚝배기 안의 장맛은 정말 훌륭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영화 '관상'


대학교 2학년쯤이었나. 출석률로 B+이상은 얻어간다는, 말 그대로 신의 교양인 '현대인과 성서'에서 a.k.a 아브라함이라 불리는 시선강탈자를 만났다. 족히 190cm는 돼 보이는 큰 키에 구레나룻부터 시작된 복슬거리는 수염은 턱 밑까지 길게 뻗었고, 해리포터 속의 모범생 같은 차림에 지각 한 번 안 하는 그의 뒤통수를 일주일에 세 시간씩 지켜보던 학기말 무렵.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돌팔이 관상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보자, 풍기는 분위기가 철학과 혹은 신학과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두 명의 여동생을 가진 과묵한 장남. 틈 없이 조밀하게 짠 시간표를 쳐내느라 학생식당에서 후루룩 식사를 해결하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범생. 통기타를 연주하고 가끔은 큰 키를 뽐내며 농구코트를 뛰어다니는 의외의 면을 가졌을지도. 음주가무와는 거리가 멀어 아기의 간을 가졌겠지만 참 지루한 일상이겠다. 단순히 어피어런스만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이겠거니 판단했다. 경솔함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시간은 흘러 몇 번의 수강신청과 시험을 반복했고,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가던 a.k.a 아브라함을 다시 마주한 건 12월 강추위도 보라카이의 12시로 착각하게 만드는 어느 금요일 밤의 클럽에서 였다.


춤추는 아브라함

칵테일바로 위장했지만 누가 봐도 클럽이었던 거기. 흩어져 있던 젊은 남녀들이 자정만 되면 약속한 듯 줄을 서서 몸을 흔들던 그곳의 금요일은 롼콰이펑의 새벽보다 밝았다. 진토닉을 물처럼 들이키며 오늘만 쓰고 버릴 관절처럼 무릎을 혹사시키고 있는데, 눈썰미 좋은 친구 하나가 클럽BGM을 뚫고 나올만한 데시벨로 "대박!" 을 외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브랗..!"


많은 사람들 사이에 우뚝 솟은 큰 키에 곱슬거리는 머리칼 하며 저 수염은 분명 아브라함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깊은 V넥인지 뭔지 쇄골이 훤히 나오는 줄무늬 면티에 가위로 오려서 벗어야 할 것 같은 쫄바지를 입은 그가 점프점프를 외치며 천장에 닿을 듯 점프를 하고 있었다. 참 정직한 수직 점프였다. 땀에 흠뻑 젖은 곱슬머리가 신나게 흔들렸다. 뚝배기의 오류이긴 한데, 뭐랄까. 장맛을 알기 전의 뚝배기가 오히려  매력적이었달까. 참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마음에 그를 보고 있자니, 우릴 알아본 건지 그저 흥에 취한 건지 저벅저벅 걸어와 팔을 벌리고 점프점프를 유도했다. 해맑게 웃는 아브라함은 마치 치팅데이를 만난 다이어터 같기도, 새로운 심장을 얻은 아이언맨 같기도 했다.


그는 기계공학과였다. 기타는 잡아본 적도 없으며, 위로 누나와 형이 있는 귀염둥이 막내라고 했다. 농구는 커녕 배드민턴도 안치는 운동헤이터에 현대인과 성서는 C+를 받았으며, 소주는 글라스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애주가라나. 잔잔해진 음악 사이로 그는 직접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고, 돌팔이 관상가는 제대로 짚은 헛다리를 절뚝였다.


콜 미 스카이 콩콩.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정해진 규칙'이라는 신조어 '국룰'. 뚝배기를 보는 시선에도 각자의 주관이 들어가는 마당에 '뚝배기보다 장맛'이 국룰이 될 수 있을까. 뚝배기보다 장맛이던, 장맛을 알기 전의 뚝배기가 오히려 매력적이었던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장맛도 모르면서 뚝배기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낫 놓고 ㄱ자 모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영역이지 않을까.


뚜스레스쥬르스면 어떻고 복스웨이건이면 어떤가. 나의 평가로 그것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따분한 일상을 보내는 모범생일줄 알았던 아브라함이 사실 막둥이 댄싱머신인걸 알았을때도 그는 확실히 force 아닌 FORCE 가 있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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