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Delhi), 빠하르간지 메인 바자르
인도 여행자라면 누구나 수상한 소문들을 접하게 된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들었던 수상한 소문에 의하면 한국 여행자들 중에서 여행 중에 사라져 그 소재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밤늦은 시간 거리를 거닐다가는 그다음 날 아침에 갠지스강 위에서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사람이 인도 사람들에게 끌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여성들에 대한 폭력적인 소문들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주는 음식, 음료를 무조건 거절하라는 충고가 이 흉흉한 소문들 뒤에는 반드시 뒤따라 왔다.
인도 여행자들은 사기, 강매, 소매치기, 성추행과 같은 폭력적인 경험에 쉽게 노출된다. 여행자들을 향한 은근한 성매매 권유와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마약을 판매하는 아이들, 시도 때도 없는 박시시 요구에 시달린다. 그래서 어떤 여행자들은 아예 "No young girls, No drugs, No baksheesh"라는 문구가 가슴에 커다랗게 쓰인 티셔츠를 구매해서 입고 다니기도 한다. 자녀 교육열에 불타는 한국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 사람이라면 어린 딸들을 성매매로 내몰고, 아들들을 거리의 마약 판매상으로 만드는 인도 사람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종교적이고도 문화적인 간극 때문이다. 인도 사람들 대부분은 힌두교도들이다. 힌두교는 윤회를 믿는다.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다음 생에서는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런 생각들이 종교와 문화로 겹겹이 쌓여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무런 죄의식이 없이 아이들을 거리로 내몬다.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멀쩡하게 태어난 아이들의 팔과 다리를 일부러 훼손해서 장애를 갖도록 만든 후에, 박시시baksheesh(구걸/적선)를 하게끔 한다. 현생이 고통스러울수록 다음 생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끔찍한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하시시(마약)를 판매하는 아이들도 비교적 자주 만날 수 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신과의 합일을 위해 사제들이 일종의 마약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마약을 통해서라도 황홀경 속에서 신적 합일을 이룰 수 있다면, 하시시 사용은 아무 문제가 안된다. 오히려 권장할만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인도 거리에서 쉽게 성매매, 하시시, 박시시에 내몰린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내몰린 아이들에게도 폭력적인 상황이지만, 그 모습을 보는 여행자들에게도 폭력적이다. 문화적, 종교적 차이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어서 어떤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나와 다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도록 몰아간다. 인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삶과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 땅에 태어났을 때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회와 문화 속에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차이를 고려한다 해도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가지고 인도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짚고 싶을 뿐이다.
이 정도면 우리는 이제 인도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험악한 상황과 흉흉한 소문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꽤나 건방진 출발을 했던 나(이전글 참고 https://brunch.co.kr/@sublimer/3)에게 인도라는 나라는 시작부터 모든 것이 문제였다. 늦은 밤 델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깊숙이 풍겨오는 낯선 냄새, 낯선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공항 입구에서부터 달려드는 릭샤꾼들을 보면서 적지 않게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 예약했던 호텔까지 갈 수 있느냐는 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릭샤꾼들은 저렴하고 더 좋은 다른 곳이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공항에서 머물다가 숙소로 향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오랜 비행시간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비싼지 싼 지 구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고-필경은 비쌌을 것이다- 흉흉한 거리를 지나 낡고 허름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었던 터라 안내받은 숙소를 거절하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나도-여행 전에 들었던 흉흉한 소문처럼- 사라져 버린 사람 중 한 사람이 될까 봐 고분고분 숙소에 들어섰다. 하지만 숙소의 더러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도저히 누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누군가가 들이닥쳐서 나를 끌고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다행히도 무사히 나는 아침을 맞이했고, 황급히 밖으로 나와 '빠하르간지 메인 바자르'로 향할 수 있었다. 빠하르간지는 제법 도시다운 모습을 띠고 있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숙소다운 숙소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빠하르간지의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낯설지만 도시 한 복판이라는 점이 안도감을 주었다. 적당한 숙소를 찾기 위해 거리를 걷던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땀 때문에 불편해서 손목에서 풀어서 가방 어깨끈에 메어두었던 시계를 내 뒤에서 어떤 아이가 풀고 있었다. 그 대담한 소매치기 현장에서 나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그 아이는 사람들 사이로 곧바로 사라져 버렸고, 나는 감히 따라나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여행 전 들었던 흉흉한 소문은 과장된 면이 있긴 해도 사실이었다.
험악한 시간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숙소를 정했다. 꽤나 말끔한 숙소였고, 인도에서의 첫 번째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졸음이 곧 쏟아졌지만, 지금 잠들면 한참을 잘 것 같아서 식사를 하고 아예 본격적으로 쉬어보자고 생각했다. 아무런 정보가 없이 거리로 나와 깨끗해 보이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들어서자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내가 아는 요리는 없었다.
게다가 영어에도 자신이 없었다. 추천을 부탁했다가 길고 긴 요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더욱 난감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메뉴판에서 적당한 요리를 골라 손으로 가리키며 "This one please"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던 종업원의 표정이 묘했다. "Only this one?"이라고 나에게 되물어왔다. 흉흉한 인도였다. 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Yea! Just this one please"라고 답했다. 나름 훌륭한 영어였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인도 음식을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달(Dal)이었다. 커다란 그릇에 진한색의 스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숟가락을 들고 나는 살며시 그 스푸를 떠먹기 시작했다. 짠 맛이 혀를 자극했다. 몇 스푼을 꾸역꾸역 먹었지만, 도저히 다 먹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주문했던 달(Dal)은 얇게 구워낸 빵인 난(naan)이나 차파티(chapati)를 찍어먹는 소스에 불과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주문하면서 "면은 빼고 주세요"라고 한 것과 같았다.
당시의 나는 아직 생존 영어의 대범함에 이르지 못했었고, 식당 종업원은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니! 사실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종업원 입장에서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괴상한 주문이었지만 결국 손님이 주문한 대로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인도는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안되는 것도 없는 기묘한 나라다. 한 동양인이 식당에 앉아 달(Dal)을 꾸역꾸역 먹는 모습을 보면서 식성과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을 했을지 혹은 배꼽을 잡고 웃었을지 모를 일이다.
운명은 꽤나 건방진 출발을 했던 나에게 합당한 시련을 주었고, 나는 델리의 흉흉함을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충분히 맛보고 있었다. 여행 전 들었던 흉흉한 소문들은 대부분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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