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라(Agra), 타지마할
델리에서 여러 날을 보냈지만, 사실 델리는 그 자체가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행 계획이나 코스를 미리 준비하지는 않은 터였다. 그래서 부담없이 단기 여행자들이 찾는 평범한 코스인 델리-아그라-자이푸르로 일주일 정도의 일정을 잡았다. 나의 발걸음은 아그라로 향했다.
인도에서 단 하나의 건축물을 보아야 한다면 나는 과감하게 타지마할(Taj Mahal)을 선택할 것이다.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자국민에게는 관대하지만 여행자에게는 꽤나 가혹하다. 인도 사람들은 40루피 정도를 지불하면 입장할 수 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려 1,000루피의 입장료를 치러야만 타지마할에 들어설 수 있다. 인도 사람은 대부분 외국인 여행자에게 비싼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일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정부마저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가격 차이다. 대 여섯 배도 아닌 25배라니! 하긴 나는 인도 거리에서 쇼핑 중에 최초 판매 가격이 1,000루피였던 물건을 흥정해서 단돈 25루피에 구매했던 적도 있으니 25배라면 그리 놀라운 수치도 아니다. 인도는 설명할 길이 없는 나라다.
간혹 인도 여행을 오래 해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거나 혹은 선천적으로 인도 사람과 비슷한 얼굴로 태어난 한국인이, 인도인 친구를 대동하고 기필코 인도 사람이라고 박박 우겨서 40루피에 입장한 경우가 있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인도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서 단순한 우스게 소리라기보다는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적인 건축물 중에 하나인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Saha Jahan)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아그라에 건립한 건축물이다. 이 건축을 위해 당대 최고의 석공, 예술가, 조각가가 참여했으며, 2만여 명의 인부와 건축 자재를 나르기 위한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티베트, 중국, 이집트, 터키 등지에서 수입해온 최고의 건축 자재와 대리석을 사용했고, 공사 기간은 총 22년에 달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타지마할에는 비극이 숨어 있다. 타지마할의 건축이 완공된 후, 샤자한은 건축을 지휘했던 기술자들과 건축가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 건축에 참여했던 2만여 명이나 되는 인부들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다시는 타지마할과 같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또 다른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타지마할만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남아야 했다.
그만큼이나 사랑했던 것일까? 타지마할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애틋했지만 잔인했다. 그 찬란했던 세기를 뒤로 나는 타지마할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기껏 내가 했던 생각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으니 최대한 오래 버티겠노라는 다짐이었다. 여행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타지마할만큼은 그런 나에게도 단순한 건물이나 유적 이상의 특별한 감상을 전해주었던 장소였다.
아마도 그것은 그 장소가 비극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장소는 숭고하지 않다. 숭고는 압도적인 크기와 함께 부정적인 요소-죽음에 대한 공포, 비극적 이야기 등-가 공존할 때 느끼는 감각이다. 타지마할은 아름답기보다 숭고하다. 그리고 그 비극의 한 복판을 여행자들이 흘러가듯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더 특별한 일은 타지마할에서 숙소로 되돌아오고 난 다음에 벌어졌다. 숙소에서 쉬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숙소 창가로 웬 얼굴 하나가 쑥 올라오더니 한국말로 내게 물었다.
"한국인이세요?"
"네. 그런데요."
"제가 너무너무 배가 아파서요. 저 좀 도와주세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데다가 인도 병원을 믿을 수 없어서 병원에는 갈 수 없다고 했다. 배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약국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그리고 그 약국에서 나는 갑자기 영어를 깨우쳤다. 영어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생존 영어는 관광 필수 영어를 책으로 백번 공부하는 것보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혹은 너무너무 어이가 없어서 분노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단숨에 도달하게 된다. 간혹 술에 거하게 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쨌거나 나는 약국에서 영어를 쏟아내었고, 나는 그에게 변비약을 사다 주었으며, 그는 쏟아내야 할 것을 쏟아냈다. 그곳에 비극은 없었다. 비극적인 고통을 넘어선 숭고함만이 우리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물론 어색한 침묵도 함께 흘렀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날 이후 그를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아그라에서 샤자한을 만났고, 한 여행자를 만났다. 아그라에 우리는 그때, 확실하게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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